용도(甬道) 치는 화성 치에 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팔달산 능선 남쪽에 서남암문이 있다. 암문을 지나면 양쪽에 여장이 있는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용도(甬道)’라 한다. 용도를 성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으나 사실은 아니다. 성이 아니고 길이다. 주변보다 바닥을 약간 높인 길이다. 그래서 ‘솟아오를 용(甬)’, ‘길 도(道)’에서 용도란 이름이 생겼다. 용도란 옛 제도에 “군량을 운반하고 매복을 서기 위해 낸 길”이라고 기록돼 있다. 운반과 매복이란 기능 중 화성 용도는 오로지 매복을 위해 만들었다. 화성의 최대 요해처인 팔달산 남쪽 능선을 오르는 적을 정탐하고 오르지 못하게 공격하기 위해서다. 적이 이곳을 점거하면 화성 전체를 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곳 안내판을 보면 “암문에서 84보 되는 동쪽에 하나의 치를 설치했고 또 10보쯤 서쪽에 하나의 치성을 설치했다. 화성에 치가 10개가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 설명에서 용도 치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용도 안에 있는 치도 화성의 치에 포함될까다. 안내판에 용도 치 2개 치를 합해 “화성에 10개 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한쪽에 한 개만 설치하고도 치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다. 치란 원성을 향하는 적을 양쪽 치에서 양옆을 공격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도 치는 한쪽에 1개만 있어 양쪽에서 협공할 수 없다. 치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먼저 용도 치도 화성 치에 낄 수 있을까에 대해 살펴보자. 의궤에 치를 설명하며 “치는 여덟 곳”이라 했다. 여기서 여덟 곳은 서1치, 서2치, 서3치, 동1치, 동2치, 동3치, 북동치, 남치를 말한다. 의궤에는 용도 치는 화성 치에 포함하지 않았다. 용도 치와 화성 치를 같이 취급하지도 않았다. 왜 용도 치와 화성 치를 같은 부류로 보지 않았을까. 기능과 구조, 기록에서 그 이유를 찾아본다. 먼저 기능이다. 치는 성에 접근하는 적을 돌출된 양쪽 치에서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용도 치는 한쪽에 1개만 있다. 마주 보는 치가 있어야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다. 단독 치는 있으나 마나다. 이런 치의 기본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구조다. 치의 제도는 “철(凸) 모양으로 성면에 붙였고 높이는 성과 같고 바깥쪽으로 현안 구멍이 1개 있다”고 의궤는 설명한다. 이것이 치의 3대 조건이다. 즉, ‘철부성면, 고여성제, 외면유현안’이다. 이 3대 조건과 용도 치의 구조와 비교해 보자. 용도 치는 돌출된 성이 아니다. 단지 여장을 밖으로 뺀 구조다. ‘성면에 붙여 돌출된, 철부성면’을 충족하지 못한다. 용도는 성이 아니므로 용도 치는 높이가 없다.‘”성과 같은 높이, 고여성제’를 충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안이 없다. ‘외면에 현안 1개, 외면유현안’을 충족하지 못한다. 치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 따라서 용도 치를 화성 치와 같이 볼 수 없다. 끝으로 기록이다. 첫째, 의궤에 용도 치의 규모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용도 치의 길이를 ‘용도 치 몇 보’로 기록하지 않고 용도 길이에 포함했다. 용도 치를 용도 여장의 한 부분으로 취급했다는 의미다. 반면 화성 치는 8개 치마다 각각 규모를 기록하고 곡성에 포함시켰다. 용도 치가 화성 치와 다른 이유다. 둘째, 의궤에 용도 치에 고유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동쪽에 1개의 치를 설치(東設一雉)하고 또 서쪽에 1개의 치를 설치(又西設一雉)”라고 기록했다. 보통명사로 표현했다. 반면 화성 치는 북동치, 서1치, 남치, 동2치 등 고유의 이름을 8개 모두에 부여했다. 용도 치가 화성 치와 다른 이유다. 일부 학자는 ‘용도동치(甬道東雉)’, ‘용도1치(甬道一雉)’, ‘새끼 치’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모두 근거가 없는 표현이다. 정리하면 용도 치와 화성 치는 같은 범주가 아니다. 기능도, 구조도, 기록에서도 다름을 보여준다. 다만 목적은 같다. 역할이 같다고 부류가 같을 수는 없다. 용도 치는 화성 치와 구분해 ‘화성 치’, ‘용도 치’로 하는 것이 맞다. 이제는 한쪽에 한 개로 기능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알아보자. 치가 제 기능을 하려면 한쪽에 최소 3개의 치성이 연속으로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용도 치는 한쪽에 1개만 있어 치의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러면 불필요한 용도 치를 설치한 것일까. 그건 아니다. 필자가 나머지 두 개의 치를 찾아 알려 드리겠다. 용도 치의 양쪽이란 용도 치의 남쪽과 북쪽을 말한다. 북쪽에도 다른 형태의 치가 있다. 서남암문 양옆의 원성이다. 이 부분이 치의 역할을 한다. 평면으로 보면 돌출돼 있고 입면으로 보면 높이 솟아있다. 용도 치와 마주보는 ‘대치(對雉)’로 치로서는 최고의 구조다. 이런 치를 ‘스스로(自) 이루어진(成) 치(雉)’, 즉 ‘자성치(自成雉)’라 한다. 남쪽에도 치가 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치다. 화양루 양옆의 돌출된 부분이다. 형태가 용도에서 돌출됐다. 의궤에 “2번 구부러져 넓혔다. 첫 번째 확장된 곳의 너비 9보, 두 번째 확장된 곳의 너비 11보로 이것이 화양루 터”라고 기록돼 있다. 화양루 그림을 보면 용도가 화양루 앞에 와서 두 번 넓어지고 총안도 있다. 모양도, 총안도, 방향도 치로 보인다. 치라는 기록도 찾아냈다. 뎡니의궤 ‘화성성역 제9’ 9월 초7일 용도 편이다. “남쪽 끝에 이르러서는 또 동서 쪽으로 각각 20척씩 빼내어 좌우로 치성을 설치했다”란 기록이다. 분명히 ‘치성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 찾은 ‘용도 치’다. 아쉬운 점은 복원이 잘못됐다. 두 번째 확장된 부분에 있어야 할 총안이 현재에는 없다. 복원 작업은 기능, 목적, 기록을 중시해야 한다. 참으로 아쉬운 복원이다. 용도 치의 정체성을 알아봤다. 치의 역할을 하면서도 고유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용도 치다. 오늘은 잃어버렸던 2개의 용도 치도 새로 찾으며 정조의 전략을 엿봤다. 글·사진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숨겨진 동장대 길이 4척을 찾다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동장대는 화성 시설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세 개의 대로 구성되는데 낮은 곳부터 하대, 중대, 상대라 부른다. 대(臺)란 시설물을 짓거나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주변보다 높은 평평한 땅을 말한다. 울퉁불퉁한 지형을 깎거나 돋워 수평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면 된다. 동장대 터는 규모가 커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터의 전체 규모였다. 터의 규모, 즉 동장대 터의 가로세로 길이는 얼마나 될까. 가장 간단한 문제를 오늘의 과제로 삼은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연구가를 포함해 대부분 동장대 규모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규모는 해당 터의 너비와 길이를 의미한다. 당시는 너비는 가로 너비 활(闊), 즉 횡활(橫闊)이라 하고 길이는 세로 길이 장(長), 즉 종장(縱長)으로 표현했다. 동장대의 규모에 대한 의궤 기록을 보자. ‘대의 너비 134척’, ‘중대 아래에 이르러서는 동서 길이가 52척’, ‘중대 동서 길이는 71척5촌’, ‘상대 석축의 동서 길이는 81척’ 등 이것이 전부다. 먼저 동장대 가로 너비를 알아보자. 의궤 기록 ‘대의 너비 134척’에서 너비는 짧은 변인 가로 길이를 말한다. 즉, 동장대 너비는 134척이다. 검증을 위해 실측해 봤다. 실측한 결과 134척으로 나왔다. 의궤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동장대 가로 너비는 134척으로 확정해도 된다. 다음으로 동장대 세로 길이를 알아보자. 의궤에는 전체 길이를 하나로 기록하지 않았다. 3개 대, 하나하나를 기록했다. 단위 명칭은 ‘동서장(東西長)’이다. 의궤에 ‘중대 아래에 이르러서는 동서 길이가 52척‘, ‘중대 동서 길이는 71척5촌, ‘상대 석축의 동서 길이 81척’이라 했다. 모두 동서장을 사용했다. 동장대는 3개의 대로 구성돼 있으므로 이 세 곳 각각의 동서장 합계가 동장대 전체의 길이가 된다. 1개 대씩 기록한 각각 길이를 합하면 동장대 전체 길이가 된다는 의미다. 합해 보니 전체 길이가 204척5촌이다. 이것이 동장대 3개 대 길이의 합이고 동장대 세로 길이다. 검증이 필요하다. 필자가 복원된 동장대의 세로 길이를 실측해 봤다. 실측을 해보니 전체 길이가 208척5촌이 나왔다. 의궤 기록보다 4척이 더 길다. 4척이란 차이는 측정 오차로 보기에는 큰 수치다. 지금까지 모두 알아 온 동장대 길이와 4척의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의궤에 기록된 길이가 4척이 짧다. 이래서 검증이 중요하다. 실측과 의궤 기록에 왜 4척의 차이가 있을까. 원인은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실측을 잘못한 경우, 복원을 잘못한 경우, 그리고 의궤 기록에 오류가 있을 경우다. 실측은 여러 번 해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복원 오류도 수긍하기 어렵다. 1970년대 복원 당시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원을 잘못해도 전체 길이에서 4척이나 차이 날 수 없다. 의궤 기록을 다시 세밀히 보자. 의궤 기록과 실측을 구간별로 비교해 보자. 기록은 하대 길이 56척, 중대 길이 71척5촌, 상대 길이 81척으로 204척5촌이다. 실측은 하대 길이 60척, 중대 길이 71척5촌, 상대 길이 81척으로 208척5촌이다. 하대(下臺)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의궤에 56척, 실측이 60척으로 4척 차이다. 왜 차이가 생겼을까. 혹시 하대와 중대의 경계선을 잘못 봤을까. 필자는 와장대가 끝나고 중대 석축이 시작되는 지점을 하대와 중대의 경계선으로 보고 실측을 했다. 근거는 ‘중대 동서 길이는 71척5촌’이라는 기록에서 ‘중대’는 원문에 ‘중대 석축’으로 돼있기 때문이다. 실측도 일치한다. 중대 석축에서 중대 길이 71척5촌을 가니 상대 석축이 나왔다. 이 상대 경계에서 상대 길이 81척을 가니 문석대가 나왔다. 이는 중대 길이 71척5촌이 의궤 기록과 일치하고 상대 길이 81척도 의궤 기록과 일치했다. 이런 사실은 실측 시 적용한 하대와 중대의 경계선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차이 4척은 어디에 있을까. 하대 길이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대 부분 의궤 설명에서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의외로 하대가 아닌 중대 부분 설명에서 찾았다. 의궤에 “중대는 돌로 쌓았는데 높이 7척5촌이다. 그 높이를 반으로 해 4척쯤 물려 또 한 층을 쌓았다”는 기록이다. 상당히 특이한 설명이다. 하대의 길이에 대한 설명이 중대 설명에 있는 이상한 형국이다. 중대 설명 중 ‘초퇴사척(稍退四尺)’, 즉 하대 쪽으로 ‘4척 물림’이란 설명이 핵심이다. 범인이다. ‘뒤로 물렸다’란 표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물린 4척 공간은 하대에도, 중대에도 속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 4척은 하대 길이 52척, 중대 길이 71척 5촌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오로지 ‘4척 물림’이라 기록했다. 이 4척 부분은 일명 ‘총수의 사대’라 불리는 곳이다. 원문에 ‘4척 물림’이라 기록해 헷갈린 것이다. 만일 ‘총수의 사대 동서장 4척(銃手射臺 東西長四尺)”이라 기록했다면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至中臺下(지중대하)’는 번역문에 ‘중대 아래까지’라 돼있다. 이 말은 ‘중대까지’ 혹은 ‘중대의 시작점까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중대 아래까지’란 말이 ‘중대에서 4척 물린 지점까지’로 볼 수 있을까. 결론은 하대의 정확한 경계선은 ‘중대에서 4척 물린 지점’이다. 의궤 기록에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당시 동장대 길이를 기록하며 3개 대를 사실상 4개 대로 나눠 기록했음이 밝혀졌다. 하대, 중대, 상대 3개 대 외에 총수의 사대를 1개의 대로 취급해 별도로 기록한 것이다. 하대의 경계선은 ‘중대에서 4척 물린 지점’임이 밝혀졌다. 잘못 알려진 하대의 경계선도 알게 됐다. 동장대의 전체 길이가 208척5촌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동장대는 가로 134척, 세로 208척5촌이 정확한 규모다. 동장대 터의 가로세로 형상비는 2 대 3이다. 영롱장 뒤 내탁부를 포함하면 1대 루트 3의 완벽한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형상비와 같다. 형상비란 가로세로의 비율로 당시 아름다움의 척도로 쓰였다. 오늘은 동장대 길이를 살펴보며 비례(比例)와 균제(均齊)를 중시한 정조의 미(美)의식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 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은구(隱溝)로 적이 통과할 수 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팔달문에서 팔달산 쪽으로 가면 관광안내소가 있다. 이 옆 주차장이 하남지 자리다. 남지를 통과한 물이 성 밑으로 빠져나가 구천(龜川)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 아래로 물이 빠져나가는 시설을 은구라 한다. ‘숨겨질 은(隱)’, ‘도랑 구(溝)’에서 은구(隱溝)라 부른다. 성 밑을 통과하는 도랑이다. 화성 시설물 중 문, 수문, 암문과 마찬가지로 은구도 성의 안팎이 열려 있는 개방 시설이다. 개방된 만큼 적의 침투를 막을 조치를 철저하게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대문은 옹성, 문루, 적대로 대비하고 수문은 쇠살문, 벽첩, 장포로 대비한다. 반면에 은구는 폐쇄 시설이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은구는 폐쇄 시설 대신 기묘한 설계로 대신하고 있다. 화성에 은구는 남은구, 북은구 두 곳이 있다. 불행하게도 복원이 안 돼 의궤 그림 남은구도(圖)를 통해 볼 수밖에 없다. 은구도를 보면 성 밑에 도랑 폭만큼 양쪽에 돌로 벽을 쌓고 물이 흐르는 가운데 부분은 짧은 기둥 3개를 세운 모습이 보인다. 이 기둥 사이로 물이 흐르는 구조다. 그림을 보면 기둥 사이가 넓다. 적이 침투할 간격이다. 적군이 침투할 수 있을까. 살펴보자. 먼저 은구의 규모를 알아보자. 통과 길이와 높이는 모두 기록에 없다. 기록에는 오직 너비만 있다. 의궤 개기 편에 “3칸 은구를 만들었는데 은구의 넓이는 4보”라고 돼 있다. 도설편 설명에도 ‘전체 너비는 4보’라고 해 너비 4보는 일치한다. 다음으로 은구의 구조를 알아보자. 의궤에 “원성을 쌓을 자리에 벽돌을 깔고 위에 짧은 돌기둥을 3줄로 세우고 4개의 도랑을 만들었다. 전체 너비는 4보이고 그 안에 또 은주를 엇비슷이 교차시켜 설치해 겨우 가는 물줄기만 통하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끝으로 은구에 쓰인 자재를 알아보자. 의궤 실입편에 은구단주석(短柱石) 37덩이가 남성에 사용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구에 쓰는 짧은 돌기둥이란 의미로 줄여 은주석이라 부른다. 은주석 1개 규격은 사방 2척에 높이는 2척2촌이다. 정리하면 은구 너비는 4보이고 기둥은 맨 앞줄에 3개, 두 번째 줄에 4개를 배치했다. 다시 세 번째는 3개가 된다. 이를 교차배열이라 한다. 남은구의 경우 이런 열이 모두 5 또는 6열이다. 기둥 규격은 사방 2척 정사각형이고 기둥은 정면으로 세우지 않고 45도를 틀어 세웠다. 이런 구조를 기준으로 적이 침투할 수 있을지 수치로 계산해 확인해 보자. 은구에는 1열 기둥이 3개이므로 도랑은 4개다. 2열 기둥은 4개이므로 도랑은 5개다. 이 중 침투에 가장 불리한 곳인 2열을 기준으로 도랑 폭을 계산해 봤다. 도랑 폭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 간격을 말한다. 적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은구 전체 너비 4보는 4.71m다. 기둥 면은 1개 기둥 면이 2척8촌이므로 기둥 4개는 11척2촌으로 3.47m다. 기둥 규격이 2척인데 2척8촌으로 계산한 것은 기둥을 45도 틀어 세웠으므로 정면에서 보면 2척8촌이 된다. 전체 은구 너비 4.71m에서 전체 기둥이 차지하는 면 3.47m를 빼면 1.24m가 물이 흐르는 부분의 합계다. 이 도랑 폭을 도랑 개수로 나눠 보면 양쪽 끝 기둥과 벽 사이는 15㎝이고 가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는 30㎝다. 30㎝는 사람이 통과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둥이 3개, 4개가 교차로 6열이 배치돼 있어 사람은 통과할 수 없다. 에스 커브로 자연스레 틀 수 있는 장어만 통과할 수 있다. 칼, 창, 총 같은 긴 무기는 물론이고 적군도 통과할 수 없는 신묘한 구조다. 그래서 의궤도 “겨우 가는 물줄기만 통하게 했다”고 표현했다. 실제 ‘물 샐 틈만 있는 구조’다. 별도의 폐쇄장치 없이 이런 완벽한 구조가 된 설계 비밀은 무엇일까. 기둥에 대한 두 가지 특별한 설계다. 첫째, 기둥 배치를 교차배열로 한 점이다. 앞줄에 3개, 다음 줄에 4개, 그다음 줄에 3개를 세웠다. 이런 열이 5 또는 6열이다. 앞줄의 열린 공간에 다음 열 기둥을 세워 열린 공간이 연속되지 않는다. 교차배치는 가장 적은 기둥 수로 가장 광범위하게 적의 침투를 막는 설계다. 한 한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설계다. 당연히 긴 직선으로 된 무기는 통과가 절대 불가능하다. 둘째, 기둥을 45도 각도로 틀어 세운 점이다. 물이 흐르는 방향에서 볼 때 바로 세우면 기둥 면 길이가 2척이다. 은주석 규격이 가로세로 2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둥을 45도 틀어 세우면 막히는 부분이 2척8촌이 된다. 8촌만큼 더 늘어난 셈이다. 그만큼 기둥과 기둥 사이의 열린 공간 폭은 줄어든다. 똑같은 재료를 방향만 틀었는데 막는 부분을 1.4배 늘리는 효과를 얻었다. 같은 자재로 62㎝ 막을 것을 87㎝를 막은 셈이다. 기둥을 틀지 않았다면 열린 공간은 얼마나 될까. 56㎝가 된다. 적의 침투도 가능하다. 45도 틀어 세운 경우 30㎝보다 거의 2배나 넓게 뚫린 편이다. 틀어 세운 설계의 다른 이점도 있다. 45도 뾰족한 부분은 물과 함께 이동하는 쓰레기가 걸리는 것을 방지한다. 앞면이 평평하면 부유물이 걸려 쌓여 물길을 막는다. 화홍문 수문 홍예에도 물이 들어오는 쪽 선단석을 45도로 뾰족한 돌을 사용해 이물질 걸림을 방지한다. 그런데 이런 계산과는 다르게 의궤 은구도를 보면 기둥 사이 공간이 꽤 넓어 보인다.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의궤 그림의 제작 의도와 작도방법에 따른 왜곡이다. 의궤 그림은 조감도 형식의 그림이면서도 치수가 완벽히 반영되지 않은 형식이다. 기능을 쉽게 알리려는 목적이 우선이므로 축척(스케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같은 규격의 자재라도 45도로 돌려세우고 같은 수량이지만 교차배치로 설계했다. 같은 재료로 물의 흐름에 유리하고 적의 침투에 불리하게 만든 은구단주석 설치는 깊은 지략이 담긴 설계다. 요즘 말로 가성비 최고라는 말은 안 어울리는 설계의 비책이다. 오늘은 물 샐 틈만 주고 적군은 통과할 틈을 없앤 은구 기둥 설계에서 정조의 지략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1천보 늘린 정조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전편에 최초의 화성 규모인 ‘3천600보 화성’의 모습을 찾아 지도로 만들어 봤다. 국내에서 처음 발표한 ‘최초 계획 3천600보 화성’ 모습이다. 그리고 정조가 변경하라고 지적한 내용도 살펴봤다. 오늘은 어디를 늘렸을까가 아닌, 왜 늘렸을까를 살펴보며 정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자. 1794년 1월15일 정조는 팔달산 정상부터 수원을 한 바퀴 돌며 성터를 확정한다. 이때 최초 계획인 ‘3천600보 화성’의 깃대 표시를 보고 여러 지적을 한다. 아울러 그 이유도 밝히고 있다. 이를 입표정기(立標定基)라 한다. 의궤 연설(筵說)에 기록돼 있다. 연설이란 임금의 자문에 신하가 답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가 한 지적에서 1천보 늘린 정조의 속마음을 헤아려 본다. 첫째, ‘화성’에 대한 정조의 속마음이다. 성을 늘리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민가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민가가 많이 훼철될 것이고, 깃대 세운 것을 가늠해 보니 성 밖으로 나갈 민가가 꽤 많을 듯하다”고 지적했다. 정조의 속마음은 관리와 함께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화성을 원했다. ‘관리의 성’에서 ‘백성의 성’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전의 성은 임금과 관리가 사용하는 면적이 성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화성은 민가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면적이냐는 수량보다 더 중요시한 게 있다. 정조는 같은 커뮤니티에서 살던 백성이 성안과 성 밖으로 나뉘는 것이 더 가슴 아팠을 것이다. 성안과 성 밖은 당시에는 엄청난 차별이다. 성안 백성과 성 밖 백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둘째, ‘수원부’에 대한 정조의 속마음이다. 정조는 수원부의 미래 확장성과 지속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이 거의 행궁의 담장처럼 보인다”,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으로 남북 간 거리를 1.5배 늘리고 면적은 2배 확장했다. 정조는 “이렇게 협소한 것은 먼 미래를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 말이 수원부의 미래를 염두에 뒀음을 증명한다. 정조의 원대한 꿈은 수원을 명실상부한 사군농공상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미래 화성부’에 대한 포석이다. 경기도청, 수원특례시, 수원농고, 서울대 농대, 농촌진흥청, 선경, 삼성, 육군 지상작전군사령부, 해군 2함대사령부, 공군 10전투비행단, 해병대 사령부는 수원 발전의 모태였다. 200년 후 정조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셋째, ‘건설경영’에 대한 정조의 속마음이다. ‘화성성역’에 대한 정조의 현실 인식이다. 바로 코앞에 성역이 시작된다. 정조는 경제성과 라이프사이클 비용을 중시했다. 모든 지적에는 방어전략, 공사기간, 공사비, 그리고 완공 후 장기간에 걸친 유지관리 등 시간, 돈, 유지관리에 대한 경영이 들어있다. 정조의 지적 내용별로 살펴보자. “성이 북쪽 마을을 통과하니 민가가 많이 훼철될 것”이라는 지적에서 속마음을 찾아보자. 이 말에는 철거, 신축, 이주 등 보상할 시간과 돈을 고려한 지적이다. 지적에 따라 성 루트를 북쪽으로 옮겨 실제 철거한 민가는 초가집 18채뿐이었다. 이곳의 40%밖에 안 되는 남성에서 철거한 초가집이 20채였던걸 보면 효과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내문성에 석성을, 외문성에 토성을 쌓을 계획이나 외문성에만 석성을 쌓으라”라는 지적에서 속마음을 찾아보자.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토성과 석성을 겹으로 쌓아 공사비와 공사 기간을 이중으로 투입하는 문제를 없앴다. 또토성은 방어에 신뢰할 수 없고 장기적 유지관리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감안한 지적이다.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지적에서 속마음을 찾아보자. 이 말은 화성 전체의 명운에 영향을 크게 미친 내용이다. 최초 계획은 동성·서성 길이보다 남성·북성 길이가 길었다. 단순히 길이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다. 남성과 북성인 평지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것이 문제였다. 정조는 공사비 단가가 비싼 평지성을 대폭 줄이고 단가가 저렴한 산상성을 늘렸다. 일석이조의 효과다. 성 높이는 평지성이 20척으로 16척의 산상성보다 4척이 더 높다. 이 차이는 소요되는 돌의 양과 성 쌓기 시공에 매우 큰 차이다. 또 평지성에는 내탁공사로 어마어마한 인공산을 쌓아야 한다. 내탁공사는 엄청난 양의 흙을 멀리서 운반하고 층마다 다져가며 내탁을 쌓아야 한다. 산상성은 자연으로 있는 산에 의탁하므로 인공으로 만들 내탁이 필요 없다. 이 지적으로 평지성 비율이 41%에서 30%로 줄었다. 내탁 유무와 성 높이 차이는 모두 돈과 시간이다. 절약이 컸다. 지금까지 살펴본 정조의 지적은 ‘신의 한 수’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정조의 행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금 마음대로 계획을 바꾼다면 계획은 왜 세웠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기본계획 ‘성설’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기본계획 ‘어제성화주략’ 제1항 ‘푼수’는 무엇이란 말인가. 따져보자. ‘성설’과 같은 기본계획의 규모는 사업 초기 단계의 수치를 의미한다. “행궁과 민가 만 호를 품을 수 있는 성의 규모는 얼마면 되겠느냐”라는 건축주 정조의 최초 물음에 다산은 “성 둘레가 3천600보라야 계획한 바에 들어맞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질문은 한 사업가가 연간 100만t의 비료를 생산할 능력의 비료공장을 계획하는 데 필요한 공장 터는 몇만 평 정도가 필요하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는 사업 초기 단계의 대략 규모라는 의미다. 실제와 차이가 있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다산의 기본계획과 실제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산의 기본계획 규모는 정확한 규모였다고 평가한다. 이유는 다산이 보고한 3천600보 화성에는 정조가 마음속에 간직한 ‘웅대한 미래 화성’에 대한 꿈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에겐 화성 백성 사랑, 수원부 미래 확장이 속마음이었고 건설경영은 내보인 마음이었다. 오늘은 최초의 화성 계획을 서슴없이 변경하고 확대한 정조의 속마음에서 정조의 ‘미래에 대한 꿈’과 ‘실용’이 있었음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다산의 ‘3천600보 최초 화성’은 어떤 모양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 오는 사람 대부분은 팔달산을 오른다. 서장대에 서면 화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성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전체 길이는 4천600보로 의궤 ‘화성전도(華城全圖)’로 전해지고 있다. 이 규모는 최종 준공 규모다. 원래 화성 기본계획과 큰 차이가 있다. 기본계획 3천600보는 축성 기본계획인 ‘어제성화주략’ 제1항 ‘푼수(分數)’에 기록돼 있다. 최초 계획은 정조의 지시로 정약용이 만든 ‘성설(城說)’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를 정조가 임금이 만든 것으로 해 어제(御製)를 붙여 ‘어제성화주략’이란 이름으로 공포했다. 아쉽게도 성 전체의 그림은 없고 3천600보라는 숫자만 남아 있다. 최초의 화성 계획, 즉 ‘다산의 3천600보 화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자. 최초 계획을 밝히는 방법은 현재 완공된 4천600보 화성을 놓고 변경된 기록 내용을 역으로 반영하면 당초 계획을 만들 수 있다. 완공된 화성은 기록으로는 의궤에 화성전도로 남아 있고 실물로는 현재 수원화성으로 남아 있다. 변경된 기록을 찾아야 한다. 화성은 최초 계획은 언제 바꿨을까. 무엇에서 무엇으로 바꿨을까. 알아보자. 한 화성 연구가는 ‘축성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조금씩 변경해서’, ‘축성공사를 진행하면서’ 성벽의 전체 길이가 1천보 늘어남에 따라 등 근거 없는 내용을 저서에 주장한다. 의아하다. 화성은 공사 도중에 변경하지 않았다. 기록 어디에도 변경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성 쌓기 공사는 1794년 1월25일에 시작해 1796년 8월18일 완료한다. 이 기간에 노선이나 규모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언제 변경했을까. 공사 기간 중이 아니고 착공 직전에 변경됐다. 어느 시점에 변경했을까. 정조의 지시로 정약용이 만든 기본계획 성설은 1792년 완성된다. 그리고 1794년 1월25일 착공식을 한다. 기본계획과 착공 사이에 2년이란 긴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착공 직전 2개월 동안 책임자 임명, 현지조사(城址看心·성지간심), 돌 뜨기 시작(浮石始役·부석시역), 측량(立標定基·입표정기), 착공식(城址開基·성지개기)까지 전광석화처럼 이뤄진다. 이 중 입표정기 때 수원화성 노선과 규모가 확정된다. 화성의 최종 모습이 확정되는 순간이다. 입표정기란 최초 계획 규모대로 노선을 정하고 깃대를 세우고(立標) 정조가 화성 노선을 확정(定基)하는 절차다. 정조는 깃대 표시를 보고 몇몇 지적을 한다. 며칠 후 지적대로 수정돼 최종 확정된다. 바로 이때 화성의 정기 3천600보 모습이 바뀌고 현재와 같은 화성 모습이 된 것이다. 더 이상의 노선 변경은 없었다. 먼저 최초 계획 화성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검증하는 방식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최초 계획 3천600보 화성, 즉 입표정기 때 깃대로 표시한 화성 모습을 필자가 지도로 만들어봤다. 국내 최초의 발표다. 지도에서 붉은색 선 부분이 최초 계획한 다산의 3천600보 화성 이다. 여기에 푸른색 선까지가 현재 완공된 정조의 4천600보 화성이다. 이제부터 검증을 해보자. 최초 계획에 대해 정조는 어떤 지적을 했을까. 지적 내용을 역으로 반영하면 최초 계획 깃대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 최초 깃대 노선이 다산이 제안한 최초 수원화성 모습이다. 네 개 지적을 하나씩 살펴보며 꽂힌 깃대를 상상해 보자. 첫째, 정조는 “깃대가 북쪽 마을을 지나가니 민가가 많이 철거될 것이고 깃대를 보니 성 밖으로 나갈 인가가 꽤 많을 듯하다”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을 보면 깃대가 행궁 북쪽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있고 깃대 밖으로 많은 민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초 계획 깃대를 북쪽 마을 중 3분의 1 정도 남쪽으로 표시했다. 둘째, 정조는 “득중정과 거리가 불과 백수십 보로 성이 마치 행궁의 담장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에서 깃대가 행궁 내 낙남헌에서 200m 정도 북쪽으로 꽂혀 있음을 알 수 있다. 200m로 정한 것은 ‘백수십 보’를 170보 정도로 간주해 계산한 거리다. 득중정은 성역 당시 현재 위치가 아니라 낙남헌 앞에 있었음을 고려했다. 이 두 번째 지적은 최초 화성의 실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다. 득중정이란 확실한 위치와 백수십 보란 숫자가 기록된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3천600보’ 지도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따라서 최초 계획 깃대를 낙남헌에서 200m 떨어진 현재 행궁동 행정센터 앞으로 표시했다. 셋째, 정조는 “성터의 남북 간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 이것은 먼 미래를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언급으로 미뤄 최초 계획 화성 모양이 남북 폭이 좁고 동서 폭은 긴 모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봐도 남북 간 거리보다 동서 간 거리가 더 길다. 넷째, “용연 위에 솟은 용두는 신령함이 있고 물막이 역할도 하니 성을 용두를 둘러쌓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용두는 현재 방화수류정 터로 용연 위로 높이 솟은 바위산을 말한다. 이 지적으로 미뤄 방화수류정 터가 깃대 표시 밖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 계획 깃대는 용두가 깃대 밖에 있어야 한다. 이상 네 가지 지적의 역반영으로 최초 계획 3천600보 화성’ 지도를 만들었다. 귀중한 자료다. 하지만 정조에 대한 몇 가지 의문도 남는다. 하나는 모든 건설사업에서 빠른 규모 확정이 매우 중요하다. 정조도 선정규모(先定規模), 즉 “무엇보다 규모(規模)를 우선(先) 정하는 것(定)이 중요하다”고 했다. 왜 정조는 화성 규모 확정을 2년이나 지체했을까. 다른 하나는 임금이라지만 정조는 규모를 1천보나 대폭 늘렸다. 건설자금도 부족한데 설계변경이 너무 컸다는 말이다. 이럴 거면 왜 기본계획을 세웠을까. 늘어난 공사비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오늘은 ‘다산의 최초 계획 3천600보 화성’을 만나봤다. 규모 변화와 의사결정을 보며 정조의 21세기 최대 경영 덕목인 분별력을 엿봤다. 1천보를 늘린 정조의 ‘속마음’은 다음 편에 계속된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조의 화성행궁 안 기억공간, 추억공간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행궁 안 정조의 휴식공간과 수양공간은 이미 살펴봤다. 오늘은 화성행궁 안에서 정조의 기억공간, 추억공간을 찾아본다. 화성행궁에 기억과 추억이 있는 건 정조의 원행(園幸) 때문이다. 아버지 능을 화산으로 모신 후 매년 원행을 했다. 특히 을묘년(1795년)에는 8일간의 대규모 원행이 있었다. 을묘원행이다. 을묘원행을 중심으로 알아본다. ■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봉수당, 장락당 봉수당(奉壽堂)은 행궁의 정전이다. 원행 중 정조가 업무를 보던 건물이다. 봉수란 “만년의 수(壽)를 받들어(奉) 빈다”는 의미로 정조가 어머니 회갑에 쓴 시에서 따왔다. 건축 특징은 단청이 없는 점이다. 본인에 엄격했던 정조의 모습을 본다. 출입은 사통팔달인 점이다. 중양문, 건장문, 경선문, 지락문을 통해 행궁 밖, 노래당, 낙남헌, 장락당으로 통한다. 정조의 소통을 느낀다. 봉수당 진찬도(進饌圖)라는 이름으로 회갑잔치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 회갑을 맞아 8일 중 5일째 날에 봉수당에서 회갑연을 베푼 모습이다. 봉수당에는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있고 앞마당에는 친인척 내빈과 외빈이 보인다. 배를 가운데 놓고 악사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무희의 모습이 보인다. 이 회갑연은 정조 재임 중 가장 큰 잔치였다고 기록돼 있다. 왜 가장 큰 잔치였을까. 정조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자. 정조에게 이날은 어머니만의 회갑이 아니었다. 아버지 회갑이기도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는 동갑내기였기 때문이다. 봉수당은 어머니뿐 아니라 먼저 세상을 뜬 아버지도 함께한 기억의 공간이다. 장락당(長樂堂)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침전으로 봉수당 남쪽에 붙어 있다. 어머니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건축에서 찾아본다. 하나는 장락당이란 이름은 직접 정조가 지었고 친필로 현판을 썼다. 장락은 “만수무강과 오랫동안(長) 삶을 즐기시라(樂)”라는 효심이 담긴 말이다. 다른 하나는 장락당에서 봉수당으로 가려면 앞마당을 지나 지락문으로 나가 돌아서 봉수당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번잡한 통로를 마루를 통해 바로 봉수당으로 오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불편함을 줄여 드리려 한 효심이 보인다. 장락당으로 통하는 문은 지락문, 다복문, 장복문, 경화문, 유복문이다.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은 즐거움, 복, 경사, 영화를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정조는 정전 봉수당과 침전 장락당에 어머니와의 기억의 흔적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기억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어머니보다 15년이나 먼저 아버지 곁으로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필자의 가슴에도 슬픔이 밀려온다. ■ 백성과의 추억공간-신풍루, 득중정, 낙남헌 신풍루(新豐樓)는 6일째 정조가 어려운 백성에게 쌀을 나눠 주는 ‘신풍루 사미(賜米)’ 행사가 있던 화성행궁 정문이다. 신풍루 문루 2층에 정조가 앉아 어려운 백성에게 쌀을 나눠 주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다. 어머니 회갑 기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회갑 기념으로 즉흥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원래 단층이었던 문을 성역 당시 2층을 증축하고 좌우 익랑도 추가로 건축했다. 이런 정조의 건축 일정은 정조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행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난한 백성들 추억이 남아 있는 신풍루다. 득중정(得中亭)은 6일째 저녁에 정조가 활쏘기 행사 ‘득중정 어사(御射)’가 있던 곳이다. 임금 행사로 보이나 사실은 활쏘기가 끝난 후 있던 불꽃놀이를 말한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많은 백성이 함께 구경했다.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한 추억이 있는 득중정이다. 낙남헌(洛南軒)에서는 3일째 ‘낙남헌 방방의(放榜儀)’, 6일째 ‘낙남헌 양로연(養老宴)’ 행사가 펼쳐진다. 방방의는 지방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특별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고, 합격증을 수여하는 행사다. 오전 9시 시험을 치르고 오후 2시 합격증 수여식을 한다. 문과 5명, 무과 56명이 합격했다. 무과 경쟁률은 2.5 대 1이었다. 정조는 붉은 바탕에 쓴 합격증을 수여하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아주고, 어사주도 한 잔씩 내려준다. 이후 합격자는 어사화를 꽂고 3일간 고향에 다녀온다. 삼일유가(三日遊街)다. 진정한 지방분권은 지방인재 발탁이다. 양로연도 낙남헌에서 있었다. 정조는 화성부 노인 384명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베푼다. 최고령은 99세였다. 특이한 것은 61세도 초청한 점이다. 어머니, 아버지와 동갑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그리움의 한 단면이다. 이처럼 경로잔치와 지방인재를 발탁하며 백성들과 함께한 추억의 공간 낙남헌이다. 특히 낙남헌은 화성행궁 전체에서 유일하게 복원하지 않은 원형 건물이다. 군청 사무실, 신풍초등학교 사무실로 쓰였다. 낙남헌과 득중정이 백성과의 추억공간인 이유를 건축 계획에서 살펴본다. 하나는 행궁 건물이 동향인데 이 두 건물만 북향을 한 점이다. 수원화성의 진산을 측면에 둔 배치다. 이유는 활쏘기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지만 백성이 직접 출입할 수 있는 편리한 공간 배치를 위해서다. 두 번째는 낙남헌은 3면이 모두 분합문으로 개방할 수 있게 설계했다. 광장과 100%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다. 세 번째, 궁궐임에도 낙남헌 전면에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점이다. 궁궐 어디에나 설치한 돌담이 아닌 이동식 낮은 홍살판으로 했다. 개방 면적을 조절하기 쉽고 백성과 소통하기 쉬운 열려 있는 담장이다. 왕의 거처, 임금에 대한 보안 측면에서 보면 파격의 파격이다. 당시로는 특별한 구조임이 틀림없다. 정조는 회갑연을 치른 장락당과 봉수당에 어머니와의 기억공간을 남겼고 신풍루 사미, 낙남헌 방방, 낙남헌 양로연을 통해 백성과의 추억공간을 남겼다. 정조는 1752년 9월22일 태어나 25세에 왕이 되지만 13년이 지난 38세가 돼서야 아버지 묘를 천장해 능으로 만든다. 그리고 5년 후 화성성역을 시작하고 3년 만에 완성한다. 그의 나이 45세다. 성역 완성 후 4년이 지난 1800년 6월27일 49세로 생을 마친다. 화성행궁에서의 노후 계획이 물거품이 돼 안타깝다. 생전에 많은 기억과 추억을 곳곳에 남긴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서1치는 왜 타구를 덮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 시설물과 치성 중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기본 시설물은 치(雉)다. 의궤에 “적이 성벽에 붙게 되면 우리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을 쏠 수도 없고 적군은 갈고리나 몽둥이로 성의 밑바탕을 허물 것이다. 그러나 좌우로 마주하는 치에서 적의 양 옆구리로 탄환과 화살을 쏘면 비루나 운제를 어찌 설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치의 역할을 설명한다. 비루(飛樓)는 트로이 목마이고 운제(雲梯)는 성을 오르는 사다리를 말한다. 이처럼 치의 주 기능은 적의 양 측면을 좌우 두 군데서 공격함으로써 적이 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다. 치의 기능에 충실하려면 좌우 방어시설 간의 유효거리 결정과 치의 돌출길이 결정이 전략적으로 설계돼야 한다. 화성에는 치가 여덟 곳 있다. 북동치, 서1·2·3치, 남치, 동1·2·3치다. 의궤에는 치 전체에 대해 공통으로 설명한 후 하나하나의 치에 대해서는 특이한 점이 있는 경우에만 개별로 기록했다. 특이 내용을 보면 북동치 경우 북동적대와 붙어 있는 점, 서1치는 타구의 위를 덮은 점, 서3치와 남치는 여장이 성안으로 들어온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은 “서1치는 타구의 위를 벽돌로 덮었다”는 특이한 설계에 대해 살펴본다. ‘타구(垜口)’란 여장의 한 단위인 타와 타가 만나는 부분의 열린 공간을 말한다. 3개의 총안 구멍이 있는 한 단위를 타로 보면 된다. 타구의 기능은 적으로부터 몸을 피하면서 동시에 열린 부분으로 적을 엿보거나 사격을 하는 공간이다. 타구는 매우 좁은 틈이므로 우리 병사가 몸을 숨길 공간이 넓다. 반면에 양쪽이 모두 날카로운 각을 이루고 있어 감시할 수 있는 범위는 크게 확장된다. 은폐와 감시, 공격을 주 임무로 한다. 매우 과학적이며 신묘한 설계다. 수원화성의 큰 자랑거리다. 이래서 타구가 없는 여장은 상상할 수 없다. 복원된 현재 서1치는 여장이 평여장이고 총안만 뚫려 있다. 의궤에 언급된 타구는 없다. 복원이 원형과 너무 다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지금의 서1치는 모양만 치다. 원래 기능을 할 수 없는 치라는 말이다. 현재의 모습이 원형과 얼마나 다를까. 복원된 서1치에는 총안 9개, 타구는 없고 현안 1개가 있다. 원형은 총안 15개, 타구 6개, 현안 1개가 배치돼야 한다. 복원이 원형보다 총안 6개가 적고 타구는 아예 없다. 복원을 너무 잘못했다. 여장에는 과학적이며 전략적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위계가 가장 낮은 하찮은 시설물이지만 복원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타구를 없앤 것은 치의 2대 장점인 자기 몸을 숨기기 잘하고 적을 엿보기 잘하는 두 기능뿐만 아니라 공격 기능도 아예 없앤 것과 마찬가지다. 타구는 5치의 좁은 틈이지만 양쪽 여장에 날카로운 각도를 안팎으로 줘 몸을 충분히 감추고 시야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신묘한 구조다. 너무나 아쉬운 복원 오류다. 서1치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기록 “서1치는 타구의 위를 벽돌로 덮었다”란 무슨 말일까. 서1치 여장은 원성에 설치된 여장과 원래 같은 모양인데 다만 타구 위를 벽돌로 덮었다는 점이 특별하다는 의미다. 타구 위에 지붕을 한 형태다. 왜 타구의 위를 모두 벽돌로 덮었을까. 답은 서1치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화성 여덟 곳 치에서 서1치만의 유일한 특징을 찾아야 한다. 바로 서1치가 위치한 입지다. 서1치는 팔달산 북쪽 능선 위에 위치한다.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능선 중간쯤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서1치 좌우의 시설물을 살펴보자. 남쪽은 팔달산 정상 쪽으로 경사를 따라 오르면 서포루(대포)가 있다. 북쪽은 아래쪽으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서북각루가 있다. 다음으로 서1치 세 방향의 지형·지세를 살펴보자. 서1치 여장 너머 성 밖 지형을 보자. 남쪽 서포루 쪽은 팔달산 정상으로 향한 오르막 급경사면이고 북쪽 서북각루 쪽은 완만한 내리막 경사면이다. 정면 서쪽은 맞은편에 높은 숙지산이 있는 형국이다. 이런 서1치 지형·지세에서 화성 전체 치와 시설물 중 유일한 점은 무엇일까. 서1치 요해처가 두 곳이 있다는 점이다. 서1치 요해처란 적이 그곳을 점령하면 서1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고 적의 사격 유효거리 안에 있다는 의미다. 또 적이 쉽게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성 밖을 말한다. 서1치 요해처 두 곳은 어디일까. 서1치 여장 높이로 수평선을 그어 더 높은 성 밖 장소가 보이면 그곳이 요해처가 된다. 하나는 남쪽 서포루 밖 팔달산 능선이다. 이곳은 서1치 여장 위보다 더 높은 지형이다. 위치는 성 밖이다. 그리고 서1치까지 거리가 120보로 활쏘기 과녁 거리 145보에도 못 미치는 유효사거리 이내다. 다른 하나는 서쪽 전면 숙지산 능선이다. 이곳도 유효사거리 이내 거리이고 성 밖이며 서1치 여장 위보다 높은 곳이다. 화성 16개 치성 중에서 오로지 서1치에만 요해처가 있는 셈이다. 성 밖이고, 자기보다 더 높고, 유효사거리 이내인 요해처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병사가 적에게 몸이 노출되고 머리 위에 총탄이 날아들 것을 생각한다면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서1치에 대책이 필요했다. 바로 타구의 위를 덮는 것이다. 비록 타구 위를 덮은 벽돌 덮개는 아주 작은 시설이지만 적에게 노출되는 병사에게는 큰 은폐시설이다. 타구 앞 병사가 머리를 노출한 것과 은폐한 것과는 실질적, 심리적 차이가 크다. 당시에는 높이 자체가 방어와 공격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화성에는 ‘높이’라는 전략적 요소만을 목적으로 설계한 시설물이 있다. 산상서성, 문루, 공심돈, 노대, 적대가 바로 높이 자체로 승부를 거는 시설물이다. 타구의 윗면을 벽돌로 덮은 여장은 서1치만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돈(墩)과 포루(舖樓)는 여장의 타구를 모두 폐쇄형으로 했다. 타구 위를 모두 지붕으로 덮었다. 서1치와 유사한 이유다. 이런 폐쇄형 타구의 전략적 본질과 의미를 알고 복원에 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치는 시설물 중 간단하고 미미한 기본 시설물이나 성으로 접근하는 적에게는 매우 두려운 존재다. 오늘은 서1치 벽돌 덮개(蓋以甓)에서 가성비 최고의 전략시설을 병사에게 선사한 정조의 전략적 의도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천하무적! 화성 기우제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는 19개 유형에 60개 시설물이 있다. 가장 적은 유형은 각 한 곳씩으로 봉돈, 성신사, 용연, 용도다. 전쟁 시설물이 아닌 것으로는 용연, 성신사가 있다. 당시 공사비 마련이 힘들었을 텐데 왜 이런 시설까지 포함했을까. 용연, 성신사는 사직단, 팔달산, 광교산, 축만제와 함께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활용된 기록이 있다. 그냥 돈을 쓴 게 결코 아니다. 기우제 기록은 수원부 계록에 있다. 이 책은 수원 유수부에서 한양에 올린 각종 문서인 ‘화영계록(華營啓錄)’을 비변사가 정리한 것이다. 아쉽게도 1845년부터 1877년까지만 남아 있다. 화영은 수원 유수부를 말한다. 군영을 갖춘 네 곳의 유수부인 개성, 강화, 수원, 광주를 송영(松營), 심영(沁營), 화영(華營), 광영(廣營)이라 불렀다. 화성을 품은 수원이 대단했다는 느낌이 든다. 보고서 내용은 강수량·가뭄·홍수 등 날씨, 씨 뿌리기, 모내기, 물 대기, 수확 등 농사에 대한 세세한 보고가 많았다. 농업이 백성 경제와 국가 세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대임을 보여준다. 물론 사농공상 중 농업을 높게 본 점도 있다. 여기에 기우제 내용이 3건 보인다. 1853년, 1867년, 1876년으로 철종 4년, 고종 4년, 고종 13년이다. 10년에 한 번 큰 가뭄이 있었던 셈이다. 기우제 실시 과정은 농사에 지장을 줄 정도로 극심한 가뭄으로 판단되면 수원부 유수가 결정하고 한양에 보고한 후 실무자에게 준비 지시를 내린다. 기우제를 지낸 후에도 실시 내용을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기우제를 중요한 행사로 취급한 흔적이다. 기우제는 누가 지냈을까. 첫 번째 철종 4년인 1853년 7월18일 실시한 기우제의 제관을 예로 보자. 헌관은 수원부 유수 서영순, 전사관 겸 재축은 수원부 판관 김기조, 축사는 영화도찰방 김기헌, 재랑은 별중사파총 박연원, 찬자에 좌사파총 한용신, 알자에 좌사우초관 오창묵이었다. 이후에 지낸 기우제 기록을 봐도 사람만 바뀌었을 뿐 직책은 변함없이 똑같다. 제관의 직책을 보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왕릉에 올리는 제향이나 화령전에 올리는 제사나 기우제 제관이나 모두 직책이 똑같다. 이는 기우제가 국가나 지방 관서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우제는 어떻게 지냈을까. 7월4일 기우제 실시를 계획하고 첫 번째 기우제를 7월6일 사직단에서, 두 번째는 7월9일 팔달산에서, 세 번째는 7월12일 광교산에서, 네 번째는 7월15일 용연에서, 그리고 7월18일 다섯 번째 기우제를 성신사에서 지내고 끝낸다. 끝낸 이유는 7월18일 1치 5푼, 20일에 6푼의 비가 왔기 때문이다. 일정에서 다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3일 간격으로 연속 실시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비가 와야 기우제를 중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강우량의 많고 적음은 관계없다. 비만 내리면 된다. “18일에 1치5푼(45㎜), 20일에 6푼(18㎜)의 비가 내려 다음 번 기우제를 중단했다”고 했다. 강우량은 무엇으로 확인했을까. 강우량의 표현은 보통 농기구인 호미와 쟁기를 빗대어 표현한다. “쟁기질 한 번 할 정도” 혹은 “호미질 두 번 할 정도”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다르다. 과학과 실용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화영계록에는 2치5푼 또는 6푼 등 수치를 겸해 기록했다. 측정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강우량 측정은 화성행궁 안 유여택 앞마당에 놓여 있는 측우기로 했다. 의궤 유여택 그림에 분명히 보인다. 유여택(維與宅)은 지금으로는 수원시장 집무실이다. 임금의 화성행궁 행차 시 집무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측우기가 화성 강우량의 측정 기준이다. 그러나 현재 유여택 마당에는 해시계가 놓여 있다. 참 생뚱맞다. 기우제는 어디서 지냈을까. 지낸 장소를 보면 사직단, 성신사, 팔달산, 광교산, 용연, 축만제로 돼 있다. 한곳에서 지내지 않고 연속적으로 바꿔 가며 지낸다. 사직단은 팔달산 서쪽에 있었으나 성역이 끝나기 1년 전 광교산 서쪽 산록으로 옮겼다. 지금은 유실됐고 보훈원 뒷산이다. 성신사는 성역이 끝나는 해에 정조의 특별 지시로 만들었다. 화성(城)을 주관하는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이다. 매년 두 번 제사를 지냈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복원 시 위치를 조금 바꿨다. 조금 바꾸나 많이 바꾸나 원형이 아닌 것은 같다. 요즘도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매년 2회 제사를 지낸다. 용연은 방화수류정 아래에 있는 원형 연못이다. 성역 이전에 자연스레 있던 물웅덩이를 정조의 명으로 확장한 것이다. 축만제는 둔전인 서둔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이어 세 번째로 만들어졌다. 흔치 않게 둑 위에 노송을 심어 아름다운 호수가 됐다. 중국의 시후(西湖)호의 이름을 따와 서호라 불린다. 팔달산과 광교산의 경우는 구체적 장소가 기록돼 있지 않다. 하늘과 가까운 능선일까, 아니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일까, 깊은 계곡일까. 궁금하다. 화성 기우제의 특징은 첫째, 화성에는 10년마다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 둘째, 화성 성역 당시 건설된 용연, 성신사, 축만제, 사직단을 활용했다. 셋째, 격식이 왕릉 제향과 화령전 제사와 똑같은 품격으로 했다. 넷째, 화성 기우제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비가 올 때까지 지냈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낸 점이 매우 흥미롭다. 고종 13년인 1876년 실시한 기우제를 보자. 비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2, 3일 간격으로 26번의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다. 첫 번째 기우제를 시작으로 여덟 번을 지낸다. 이후 이틀에 걸쳐 비가 조금 왔기 때문에 중단했다. 비가 더는 안 오자 다시 열두 번을 지내고 중단한다. 이때 비가 안 왔는데도 중단한 이유는 ‘기우제는 열두 번이 한계’로 돼 있는 예전(禮典)의 규정 때문이다. 잠시 쉰 후 다시 여섯 번의 기우제를 지냈다. 여섯 번째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내려 끝낼 수 있었다. 고양이 오줌 같은 5㎜의 비가 온 것이다. 화성 기우제는 어떤 귀신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시스템이다. 천하무적 화성 기우제다. 기우제를 지낸 화성 시설물, 용연, 성신사, 사직단, 축만제에서 정조의 혜안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초(譙)’는 어떤 시설물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우선 화성 규모와 화성 시설물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화성 시설물은 19개 유형에 60개다. 화성 규모는 4천600보로 5.4㎞다. 이 화성 규모 4천600보에는 옹성과 용도는 포함되지 않는다. 의궤는 옹성과 용도를 성과 별도로 구분해 분류하기 때문이다. 의궤 기준을 따라야 한다. 이 두 가지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도 정립되지 않아 아쉽다. 시설물 19개의 유형을 보면 문, 옹성, 적대, 암문, 수문, 은구, 지, 장대, 노대, 공심돈, 봉돈, 각루, 포루(대포), 포루(군졸), 치, 포사, 성신사, 용도, 용연이다. 이는 의궤 도설에 기록된 시설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순서도 같은 체계다. 발표하거나 안내하는 기관마다 화성 시설물 수가 다르니 세계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을까. 성 규모를 보면 의궤에 “성 둘레가 4천600보인데 이 안에 문이나 초, 치, 포, 대, 돈(譙雉舖臺墩) 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635보4척이고, 이 밖에 원성이 3천964보2척”이라고 설명한다. 이 기록에는 화성 전체 규모, 곡성 규모, 원성 규모가 모두 포함돼 있다. 4천600보가 화성 전체 규모, 635보4척이 곡성, 3천964보2척이 원성이다. 당연히 원성과 곡성의 합이 화성 규모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곡성에 포함되는 시설물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의궤에 곡성을 설명하며 ‘문, 초, 치, 포, 대, 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유형에 들지 않으면 곡성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중요한 정의다. 문제는 알 수 없는 용어가 하나 있다는 점이다. 현재에도 그리고 의궤에도 쓰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바로 ‘초(譙)’란 명칭이다. 이곳 외에 의궤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림이나 설명에도 없는 시설물 이름이다. 유일하게 여기에 단 한 번 나온다. ‘초’는 어느 시설물을 말할까. 밝혀보자. 의궤에 낯선 용어가 나오면 우선 참고하는 자료는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 해설집’이다. 화성성역의궤 번역본과 함께 발간된 책이다. 용어해설집에서 찾아보면, 초를 ‘성 위의 문루나 망루’, ‘성곽의 문루 또는 망루의 총칭’이라 설명한다. 다음 포털에서 찾아보면 ‘궁문 또는 성문 따위의 바깥 문 위에 지은 다락집’이라 나온다. 이런 해설과 설명을 바탕으로 본다면 초는 현재 화성에 보이는 문루 혹은 공심돈으로 일단 판단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전적 설명으로 화성 시설물 중 어느 유형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판단과 사실은 별개다. 누구나 인정하는 확인이 필요하다. 확인을 위해 출발하자. 초를 제외한 나머지 유형의 용어는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문, 초, 치, 포, 대, 돈’ 6개 유형에서 초를 제외한 나머지 5개 유형 시설물은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보자. 문은 문, 암문, 수문이고, 치는 치가 해당하고 포는 포루(군졸)이며 돈은 공심돈, 봉돈이 해당하고 대는 적대, 장대, 노대가 해당한다. 포를 포루(군졸)로 본 이유는 원문에 ‘포(舖)’로 돼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60개 시설물, 19개 유형 중 곡성을 이루는 시설물에서 빠진 유형이 하나 남는다. 바로 포루다. 같은 한글 이름이지만 이 포루는 대포를 쏘는 포병 진지 포루(砲樓)다. 이렇다면 현재로는 초는 지금의 포루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초는 포루’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 검증이 필요하다. 가능성과 확정은 별개다. 가장 확실한 건 수치를 활용한 검증이다. 의궤 기록에 “곡성의 총 규모는 문, 초, 치, 포, 대, 돈의 합으로 635보4척”이라 했다. 확인하기에 사용하기 좋은 자료다. 635보4척은 전체 6개 유형의 곡성 길이 합계다. 전체에서 불분명한 초를 제외하고 확실한 나머지 5개 유형의 곡성 길이를 먼저 구해보자. 문은 문 네 곳, 암문 다섯 곳, 수문 두 곳으로 모두 11곳이다. 각 길이를 합하면 140보3척이다. 치는 순수한 치 여덟 곳으로 합이 130보이고 포는 포루(군졸) 다섯 곳으로 합계 85보2척이다. 돈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봉돈 세 곳으로 합으로 72보4척이다. 그리고 대는 적대 네 곳, 동북노대 한 곳으로 합이 105보다. 의궤에 시설물별로 곡성 길이 기록이 있다. 이 계산에 동북공심돈, 서장대, 동장대, 서노대 길이를 계산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 시설물은 곡성도 아니고 원성도 아닌, ‘성안에 설치된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명 ‘재성신지내(在城身之內) 시설물’로 분류된다. 이 부류는 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성에서 돌출시켜 인공적으로 만든 곡성이 아니고 그냥 성안 원지반에 지은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시설물이 곡성에 해당하는지 구분이 중요하다. 이렇게 초를 제외한 분명한 5개 유형, 27개 시설물의 곡성 길이 합은 533보3척이다. 그렇다면 불분명한 시설물 초에 해당하는 길이는 6개 유형 전체 길이에서 5개 유형을 뺀 나머지가 된다. 나머지 길이가 포루(대포) 다섯 곳 길이의 합계와 일치한다면 ‘초는 포루’임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6개 유형 곡성 길이 합계 635보4척에서 5개 유형 합계 533보3척을 빼면 102보1척이다. 이것이 초의 규모다. 이 수치가 5개 포루의 합계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해보자. 포루 규모는 의궤에 포루별로 기록돼 있다. 북동포루 21보1척, 북서포루 22보, 서포루 18보4척, 남포루 20보3척, 동포루 20보다. 포루 다섯 곳의 합은 102보1척이다. 포루 전체 길이다. 초의 규모는 102보1척이고 포루의 규모도 102보1척이다. 정확히 일치한다. 가능성이 확정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따라서 의궤에 단 한 번 나오는 용어 초는 포병 진지 포루로 확정할 수 있다. 건축용어해설집이나 포털에서 말한 초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것이다. 결론은 ‘초는 포루’다. 비록 지금과 사용 용어는 달라도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지금 사용하지 않는 시설물 용어 ‘초’를 알아보며 정조의 화성성역의궤 편찬의 정확성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포루 3층은 벽체일까? 여장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시설물로 화성에 다섯 곳이 있다.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다. 동서남북에 하나씩인데 북쪽에만 2개다. 북문의 동쪽에 북동포루를 추가한 것은 북수문 방어 강화가 목적이다. 의궤의 제도에 대해 “성에서 돌출한 모양으로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다. 3층으로 해 그 가운데 속을 비운 점이 공심돈 구조와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1층과 2층은 포를 쏘는 곳이고 3층은 집을 짓고 적을 정탐하거나 총을 쏘는 곳으로 만들었다. 모두 벽돌로 조성했는데 1, 2층은 벽체이고 3층은 여장이라는 말이다. 의궤 실입 편에는 화성 전체의 여장 길이가 기록돼 있다. 북동포루와 북서포루는 11파(把) 4척(尺)으로 같고 서포루 9파 1척, 남포루 10파 4척, 동포루 12파다. 이처럼 포루 3층이 여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위치가 원성 여장과 같고 외형도 여장의 모양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궤에 포루별로 여장 길이가 기록돼 있어 의문이 없다. 그런데 의궤 도설 편에 포루에 대해 “3면 벽(甓)의 두께 6척, 높이는 들보와 이어져 있고 두께는 처마 두께와 비슷하다”고 구조를 설명한다. 이 설명을 보면 벽돌벽이 들보와 이어져 있다. 3층이 여장과 다른 점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하나는 “벽돌이 들보에 붙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두께가 처마 두께와 비슷하다”는 내용 때문이다. ‘들보까지’라는 말은 높이가 여장 높이와 다름을 보여준다. ‘두께가 처마 두께와 비슷하다’는 말도 두께가 여장 두께와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3층 부분을 권5 실입에는 여장으로, 권수 도설에는 벽체로 시사하고 있다. 과연 포루 3층은 벽일까, 여장일까. 미스터리다. 확인을 향해 떠나보자. 의궤의 그림과 설명, 그리고 실물로는 그 무엇도 확정할 수 없다. 그림은 외형만 보이고, 설명은 서로 다르고, 실물은 원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수치로 확인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실입에 기록된 ‘여장 길이’와 도설에 기록된 ‘포루 크기’를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 둘은 같은 3층이지만 하나는 여장으로, 다른 하나는 벽체로 말하고 있다. 여장과 벽체를 구분해낼 좋은 자료다. 먼저 포루의 크기다. 의궤는 다섯 곳 중 서포루 한 곳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공통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크기 기록이 남아 있는 서포루를 분석 자료로 사용한다. 서포루는 ‘바깥쪽 아래 너비 21척, 위의 줄어든 너비 17척, 좌우의 아래 너비 각각 24척, 위의 줄어든 너비 22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성안 쪽 내면을 보면 출입문과 문 양쪽에 벽돌 구조물이 있다. 여기서 바깥쪽이란 돌출된 3면 중 ‘외면’을 말하고, 좌우는 돌출된 면 중 ‘좌측면과 우측면’을 말한다. 또 ‘아래 너비’는 1층에서 땅과 만나는 부분의 너비이고 ‘위 너비’는 위쪽 3층 너비를 의미한다. 벽이 아래에서 위로 경사가 져 위의 길이와 아래 길이가 다르다. 물론 아래 길이가 위 길이보다 길다. 다음은 여장 길이다. 서포루의 여장 길이는 9파 2척이다. 환산하면 47척이 된다. 여장 단위는 영조척으로 따져 5척이 1파이고 4파가 1첩(堞)이다. 분석 방법은 실입 편에 나오는 서포루 여장 길이 47척과 도설 편에 나오는 포루 크기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즉, 서포루 여장 길이 47척이 도설에 나오는 3층 좌측면, 외면, 우측면, 내면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밝히면 된다. 어느 부분 길이와 일치하는지 찾는 작업이다. 아주 쉽다. 도설에 나온 수치는 외면 17척, 좌측면 18척, 우측면 18척, 내면 11척이다. 내면 길이는 내면 전체 길이 17척에서 출입문 폭 6척을 뺀 길이다. 좌우면 길이는 좌우면 길이 22척에서 외면 두께 4척을 뺀 길이이다. 3층은 외면, 좌측면, 우측면, 내면으로 4개 면으로 구성된다. 계산해야 할 모든 경우는 전체 4면인 경우, 외면과 좌우면 3면인 경우, 내면과 좌우면 3면인 경우, 좌우면 2면인 경우 등 네 가지 경우다. 도설에 나온 수치로 계산한 결과를 보자. 전체 4면 길이 합은 64척, 외면과 좌우면 3면 길이 합은 53척, 내면과 좌우면 3면 길이 합은 47척, 그리고, 좌우 2면 길이 합은 36척이다. 비교해 보자. 실입 편 여장 길이 47척과 일치하는 도설 편 포루 크기는 세 번째 경우다. 포루의 내면과 좌우면 3면의 합으로 47척이다. 이 결과는 ‘포루 3층에서 여장은 전후좌우 4개 면에서 내면, 좌측면, 우측면 3면만 여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아울러 돌출된 바깥면, 즉 외면은 여장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됐다. 의외의 결과다. 필자도 놀랐다. 포루 3층 전체가 여장이라고 당연히 알아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포루 3층 바깥쪽 외면은 벽체란 것도 새로 밝혀졌다. 포루는 왜 외면을 벽체로 했을까. 여장과 벽체의 차이가 두께다. 여장보다 벽체가 두께가 더 두껍다. 외면을 더 두껍게 한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포 공격을 받을 확률 때문이다. 적의 포 공격은 아무래도 포루의 전면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포루의 4면 중 외면이다. 집중 공격을 받을 외면을 더 두껍게 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당연하다. 그래서 포루 3층 외면은 여장보다 두꺼운 벽체로 설계한 것이다. 아래 벽체 두께를 그대로 처마 밑까지 올렸다. 둘째, 포루에서 벽돌 구조의 취약성 때문이다. 포루는 내부가 비어 있는 구조다. 특히 벽돌 구조는 횡력에 약한 구조다. 이런 조적조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외면을 여장이 아닌 두꺼운 벽체로 설계한 것이다. 검증은 할 수 없을까. 포루는 모두 복원된 시설물이라 검증이 어렵다. 다만 1950년경 서포루 사진에서 성역 당시의 구조를 볼 수 있다. 확대한 사진의 3층 단면을 보면 외면 벽체 두께가 좌우면 여장 두께보다 두꺼운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 포루 3층 전체를 통일시키지 않고 적의 공격에 많이 노출되는 외면 한 곳만 더 두껍게 설계한 포루 구조를 봤다. 포루 3층 구조에서 정조의 전략적이며 세심한 설계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왜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두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에는 보병 진지인 포루가 다섯 곳이 있다. 그런데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는 없는 특이하고 유일한 점이 여럿 있다. 하나는 위계가 낮은 건물인데도 ‘각건대’란 별칭을 부여받았고 둘째는 벽등(甓磴)을 설치한 점, 셋째는 치성에 벽돌을 사용한 점, 그리고 지붕에 용두를 설치한 점 등이다. 이 중 ‘전편에 왜 벽등을 쌓았을까’에 대해 답을 찾아봤다. 요약하면 한정된 공간에 2배의 병력을 운용하기 위함이고 비상시에 집 안의 병사들이 공격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을 10분의 1로 줄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오늘은 ‘왜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쌓았을까’에 대해 살펴본다. 답은 벽등 자체에서 찾았다. 왜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뒀을까에 대한 답은 동북포루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즉, 동북포루는 왜 다른 포루에 비해 두세배의 병력이 필요했을까를 알아내야 한다. 더 많은 병력을 운용해야 할 동북포루만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평면 입지, 입면 입지, 공간 입지로 나눠 살펴보자. 공간 입지란 위치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 평면 입지다. 동북포루의 방어 범위에 대한 문제다. 의궤에 “화성에 치는 여덟 곳이지만 실제로는 16곳이나 된다”라는 말을 맨 앞에 던져놓았다. 이 의미는 치, 포루(군졸), 공심돈, 봉돈, 노대는 구조와 역할이 같다는 의미다. 각루, 포루(대포)도 구조적 분류만 다를 뿐 기본 역할은 같다. 화성은 이웃하는 시설물 사이에서 유기적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유기적 방어란 양쪽 두 시설물에서 원성에 접근하는 적을 좌우에서 옆구리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한 시설물 자체의 독자적 역할보다 몇 배의 효과를 낸다. 화성 시설물 대부분이 성에서 돌출시킨 철성(凸城)제도로 일정 간격으로 연이어 배치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 동북포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원성을 살펴보자. 모습이 2개의 활이 연속적으로 놓인 모습이다. 첨부한 주변 지형도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동장대에서 동북포루까지 1개, 동북포루에서 북동포루까지 1개로 2개의 활이 연속된 모양이다. 화성 전체에서 이런 형태의 원성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런 입지에서 동북포루의 방어 담당구역을 보자. 좌측으로 북암문·북수문·북동포루까지, 우측으로 동암문과 동장대까지 담당한다. 여기서 암문은 방어시설로 보지 않는다. 어차피 비상시 암문 폐쇄를 원칙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담당 구역의 범위를 보면 좌측이 378보3척, 우측이 304보2척이다. 화성에서 담당 구역이 꽤 넓은 편이다. 얼마나 큰 편일까. 화성에서 시설물 간 거리 평균이 원성 거리로 107보다. 이곳은 화성 평균의 3배 약간 넘는 방어 범위다. 직선거리로 봐도 양쪽 모두 300m, 즉 255보에 이른다. 평균의 3배가 넘는 범위를 담당하려면 당연히 다른 시설물보다 3배의 병력과 화력을 배치해야 한다. 이것이 벽등이 있어야 할 첫 번째 이유다. 둘째, 입면 입지다. 화성의 요충지 동북포루의 문제다. 동장대에서 북동포루까지 높낮이를 보자. ‘동장대에서 동암문까지 내리막, 동암문에서 동북포루까지 오르막이 되고, 동북포루에서 북암문까지는 굽어진 내리막, 북암문에서 동북각루는 휘어도는 오르막, 그리고 동북각루에서 북수문으로 내리막’인 지세다.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이 범위에서 최고로 높은 곳은 동북포루가 있는 자리다. 동북포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내리막이 연속된 지형·지세다. 글보다도 실제 동북포루의 벽등에 올라보자. 누구에게나 한눈에 이런 지세가 들어온다. 벽등에 오르는 것은 허용되니 누구나 볼 수 있다. 수원화성이 좋은 이유다. 이런 요충지 동북포루 입지를 생각하면 중요한 것은 동북포루 자기 자신의 방어다. 동북포루가 적에게 함락된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동북성 전체를 적에게 내어준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동북포루는 자신도 지켜야 하고 동북성 전체도 지켜야 하는 운명이다. 동북포루의 입지 중요성은 팔달산 남쪽 능선과 같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대해 “적군이 점거하면 화성 전체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 된다”고 했다. 즉, 화성 요해처다. 이를 대입하면 동북포루 입지도 마찬가지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 방화수류정과 동장대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동북포루를 적군에게 빼앗기면 화성 전체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 된다”가 될 것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방어 병력을 많이 배치한다. 이래서 팔달산 남쪽 능선에 용도를 설치했다. 용도는 긴 구간에 병력을 많이 배치할 수 있다. 동북포루에는 무슨 대책을 계획했을까. 동북포루에는 벽등을 설계했다. 벽등은 병력을 위아래로 배치할 수 있는 특수한 시설이다. 같은 평면에 2배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다. 이것이 벽등이 있어야 할 두 번째 이유다. 셋째, 공간 입지이다. 동북포루 터에 대한 문제다. 동북포루는 산꼭대기에 위치한다. 꼭 설치해야 할 위치이지만 터에 큰 단점이 있었다. 뾰족한 산꼭대기여서 평평하고 너른 터가 없었다. 더구나 동북포루는 돌출된 치성 위에 배치해야 했기에 너른 터를 만들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포루 중 동북포루가 작은 이유다. 비좁은 산꼭대기 터여서 전후좌우 수평으로 확장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이 벽등이었다. 위아래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수평 확장이 아닌 수직 확장 설계인 셈이다. 똑같은 평면에 사용 공간을 수직 방향으로 늘린 것이다. 좁은 공간을 2배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벽등이다. 3배 병력 운용 중 나머지 1배는 어디일까. 동북포루 벽체다. 동북포루 안에 남아 있는 병력이 전안폐판의 총안을 통해 적을 공격하도록 했다. 1군은 벽등 위에서, 2군은 벽등 아래에서, 3군은 포루 안에서 방어와 공격을 맡았다. 3배의 병력과 화력의 운용이다. 이 중 3분의 2를 벽등이 맡았다. 이것이 벽등이 있어야 할 세 번째 이유다. 정리하면 동북포루의 방어 범위가 다른 포루의 3배나 넓었고 북동쪽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또 산꼭대기여서 많은 병력을 운용할 터가 좁았다. 이런 조건이 동북포루 벽등의 탄생이다. 오늘은 3차원 입지 분석으로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설치한 이유를 살펴보며 정조의 전략적 공간 감각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왜 벽등(甓磴)을 쌓았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포루(舖樓)는 포루(砲樓)와 우리말로 같아 꼭 한자를 병용해야 하는 시설물이다. 포루(군졸)는 보병이, 포루(대포)는 포병이 사용하는 시설물로 구분하면 쉽다. 포루(군졸)에 대해 의궤는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舖)라 한다’고 했다. 적을 염탐하고 방어하는 병사들이 휴식과 비 및 햇볕을 피하라고 치 위에 집을 지었기에 포(舖)를 붙여 포루라 한다. 사실은 휴식보다 우리 병사가 적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집을 지었다. 화성에는 모두 다섯 곳의 포루가 있다. 동1포루, 동2포루,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 등이다. 이 중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용연에서 동쪽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해넘이를 감상하는 포인트로 알려져 주말에는 사진가와 젊은 연인들이 동북포루 안팎에 모여든다. 포루는 화성 시설물 중 위계가 낮은 시설물이다. 하지만 동북포루는 ‘각건대’란 별칭을 부여받은 점, 벽등(甓磴)을 설치한 점, 치성에 벽돌을 사용한 점, 지붕에 용두를 사용한 점 등 매우 특이하다. 모두 화성 전체 시설물에서 유일한 점이다. 이 중 벽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도대체 벽등은 무엇일까. 그 어느 곳에도 기록이나 설명 자료가 없다. 미스터리다. 우선 벽등의 구조를 살펴보자. 의궤에 “여장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했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라는 기록이 있다. 쉽게 말해 여장이 두 겹이란 말이다. 원래 여장이 있고 여장 뒤와 집 사이 공간에 벽돌로 여장을 한 겹 더 쌓은 구조다. 이렇게 한 겹 더 쌓은 벽돌 구조물을 벽등이라 부른다. 재료가 벽돌(甓)이고 길보다 바닥이 높아 오르기(磴) 때문에 벽등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왜 이 공간을 벽돌로 채웠을까. 바닥 면적이 너무 커 집과 여장 사이 빈 곳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일까. 다섯 곳 포루의 바닥 면적을 비교해 이런 전제가 맞는지 확인해 본다. 규모는 서포루가 75척6촌으로 가장 크고 북포루와 동1포루가 65척, 동북포루가 61척, 그리고 동2포루가 59척으로 가장 작다. 동북포루는 전체 포루의 평균 크기 65척에도 못 미치고 끝에서 두 번째 크기다. 포루 중 작은 규모다. 이런 사실은 벽등이 구조나 크기 등 외형적 요인에 의해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의도일까. 의궤 기록에서 탐험을 시작한다. 의궤에 벽등을 “높이는 난간 바닥에서 그치며 벽등 아래위에 네모난 총안 19개와 누혈 11개를 뚫어 놓았다”고 설명한다. 이 내용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고지란저(高止欄底)”와 “상하착방안(上下鑿方眼)” 두 내용이다. 즉, “벽등 높이가 집의 바닥 난간 밑까지(고지란저)”와 “총안을 벽등 위아래에 뚫었다(상하착방안)”이다. 이것이 벽등 미스터리를 풀 두 열쇠다. 첫째, 왜 ‘벽등의 위아래,에 총안을 뚫었을까. 이곳만의 특별한 ‘위아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시설물은 여장에 한 줄의 총안이 설치돼 있다. 유일하게 동북포루는 ‘위아래’, 즉, 위에 한 줄, 아래에 한 줄 총안을 설치했다. 위아래 총안은 바로 위아래 공격력이다. 즉, 다른 포루에 비해 2배의 병력과 화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 팀은 벽등 위에서 여장을 방패 삼아, 다른 한 팀은 벽등 아래에서 벽등을 방패 삼아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구조다. 둘째, 왜 ‘집의 바닥 난간 밑까지’ 쌓았을까. 벽등 높이, 즉 벽등 위 바닥 레벨을 “집의 난간 바닥 밑까지”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은 이 레벨이 벽등 설계의 최적 높이이기 때문이다. 더 높아도, 더 낮아도 안 된다는 의미다. 집 밖에서 보이는 ‘난간 밑’은 집 안의 마룻바닥과 같은 레벨이다. 벽등 위 바닥이 이 레벨보다 더 높거나 더 낮다면 벽등이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공격 목적 때문이다. 벽등 높이가 마룻바닥 레벨보다 낮으면 벽등 아래에서 병사가 총을 쏠 수 없다. 바닥에서 마루 밑까지 높이가 낮아져 총 쏘는 자세가 안 나온다. 반대로 더 높으면 벽등 위에서 총을 쏠 수 없다. 총 쏘는 병사가 여장 위로 온몸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벽등의 높이로 설계된 ‘집의 바닥 난간 밑 레벨’은 벽등의 최적 높이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병사들의 이동 때문이다. 동북포루는 집 안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삼면의 판문을 열고 바로 벽등 위로 나가도록 설계했다. 화성에서 유일한 설계다. 이 경우 벽등 위로 나갈 때 병사의 두 발이 안전해야 한다. 두 발의 높이에 차이가 있으면 넘어질 위험이 크다. 집 안 마루와 벽등 윗면이 같아야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 벽등이 없었다면 병사가 작은 출입문을 나가 좁은 계단으로 내려간 후 다시 높은 벽등에 올라야 했다. 전투 시설물로는 있을 수 없는 동선이다. 그래서 삼면의 판문을 통해 직접 나갈 수 있게 처음부터 설계했다. 집 밖 내탁에서 벽등에 오르는 계단을 설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판문으로 이동하도록 설계했음을 증명한다. 정리하면 벽등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 화력과 병력을 2배 늘려주고 길고 혼잡한 병사의 이동 동선을 10분의 1로 줄여주는 신묘한 구조다. 이런 과학적 의미가 있음에도 복원이 잘못돼 매우 안타깝다. 현재 동북포루는 벽등 위 높이가 ‘집의 난간 밑’과 같은 레벨이 아니고 설계보다 50㎝가 낮게 복원됐다. ‘난간 밑까지’의 개념을 무시한 복원이다. 이유는 복원 시 기준을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치 축, 평면 기준, 단면 기준이 중구난방이다. 치성 따로, 목구조 따로, 토목 따로, 각자 복원했기 때문이다. 복원공사는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조정과 통합이 필수다. 본질을 꿰고 있던 성역 당시의 감동당상 조심태가 필요한 지금이다. 벽등 하나를 추가함으로써 2배의 공격력과 10배의 신속함을 실현한 동북포루 벽등에서 정조의 지략과 설계 의도를 엿봤다. 화성 모든 시설물 중 왜 동북포루에만 벽등을 설치했을까? 미스터리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현안 수량은 어떻게 정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성 밖에서 보면 치성이나 옹성에 위에서 아래로 길게 파인 홈을 현안이라 한다. 현안은 치성 바로 밑까지 다가온 적병을 감시하는 시설로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옹성과 모든 치성에 빠짐없이 설치한 것만 봐도 그렇다. 설치 위치는 이렇듯 옹성과 모든 치성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현안 설치 수량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까. 이에 대해 알아본다. 현안도 시설이므로 설치할 시설물의 구조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설치할 시설물의 너비, 높이 등 외형적 크기와의 관계다. 감시 범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설치된 곳의 높이와 너비와 관련이 있는지 따져보자. 첫째, 높이에 따라 현안 수를 결정할까. 옹성의 경우를 보자. 옹성 높이는 북옹성과 남옹성이 5.1m로 같고 동옹성 2.9m, 서옹성 3.4m다. 설치 현안 수는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과 서옹성 3개로 같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높이가 같은데 현안 수는 북옹성이 4개가 더 많다. 또 서옹성이 동옹성보다 높이가 높은데 현안 수는 같다. 치성의 경우를 보자. 봉돈이 가장 높고 적대, 동북노대, 서북공심돈, 포루(군졸), 치 순서로 높이가 낮다. 현안은 적대가 3개, 동북노대,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봉돈이 2개, 그리고 포루와 치는 1개다. 이 데이터를 보면 높이가 높은 봉돈이 낮은 적대보다 현안 수가 1개 적다. 또 옹성과 치성 전체를 놓고 봐도 동옹성, 서옹성이 높이가 가장 낮은데 현안 수는 높이가 높은 치성보다 더 많다. 옹성이나 치성이나 모두 높이와 현안 수는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둘째, 너비에 따라 현안 수를 결정할까. 옹성의 경우다. 옹성 너비는 북옹성과 남옹성이 209척, 동옹성 90척, 서옹성 110척이다. 설치 현안 수는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과 서옹성이 3개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너비가 같은데 북옹성 현안이 4개가 더 많다. 또 서옹성이 동옹성보다 너비가 넓은데 현안 수는 같다. 치성의 경우다. 치성 너비는 같은 유형 중 큰 것 순서로 보면 북포루 30척, 동삼치 25척4촌, 서북공심돈 25척, 동북노대 19척이다. 설치 현안 수는 포루와 치는 1개, 서북공심돈 2개, 동북노대 2개다. 북포루와 동삼치는 서북공심돈과 동북노대보다 너비는 넓은데 현안은 1개가 적다. 1개가 설치된 시설물이 2개 설치된 시설물보다 너비가 넓은 형국이다. 따라서 너비와 현안 수 관계는 무관함이 밝혀졌다. 정리하면 높이가 높다고 현안 수를 많이, 낮다고 적게 설치하지 않은 결과를 알 수 있다. 너비도 같은 결과다. 전면 폭이 넓다고 현안을 많이, 좁다고 적게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건 넓이건 외형에 따라 설치할 현안 수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일까. 찾아보자. 우선 화성의 ‘시설물별 현안 수량 현황’을 보자.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 3개, 서옹성 3개, 북성적대 3개, 남성적대 2개, 동북노대 2개, 서북공심돈 2개, 남공심돈 2개, 봉돈 2개, 포루(군졸) 1개, 치 1개 순이다. 25개 시설물이다. 이 현황을 보시고 눈치챘을 것이다. 하나는 위 시설물 순서가 현안 수가 많은 시설물부터 적은 시설물까지 순서인 점이다. 다른 하나는 위 시설물 순서가 의궤에 기록된 순서와 똑같다는 점이다. 현안 수량 순서가 의궤 설명 순서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순서가 일치한다는 것은 규칙이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역의궤 시설물 설명 순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의미가 바로 기준이 될 수 있다. 의궤에 기록된 시설물 설명 순서를 유형별로 보면 문, 암문, 수문, 은구, 장대, 노대, 공심돈, 봉돈, 각루, 포루(대포), 포루(군졸), 치, 포사, 성신사 순이다. 무슨 순서일까. 바로 이 기록 순서가 당시 화성 시설물 사이의 위계(位階) 순서다. 위계는 위아래 계급을 말한다. 조선 건축은 건물 간 위계(하이어라키)를 철저히 지켰다. 영조(營造) 규범이기 때문이다. 규(規)도 범(範)도 모두 법을 의미한다. 설치할 현안 수도 위계를 꼭 지켜야 한다. 규범을 넘어 자의적 판단으로 현안 수량을 정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봉돈이 아무리 넓고 높아도 위계를 앞지르며 위계가 높은 적대를 앞질러 3개가 될 수 없다. 옹성 높이가 아무리 낮다 해도 위계가 낮은 포루보다 적은 현안 수를 설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계는 조선 건축에서 중요한 설계 요소였다. 지금의 건축법이다. 건폐율, 용적률, 건물 높이를 준수해야 하는 법이다. 궁궐, 서원, 사찰, 민가 건축에서 건물 간 위계는 분명했다. 위계의 기준은 무엇일까. 궁궐 건축, 민가 건축은 사용자의 권력에 의해 위계가 정해진다. 서원 건축, 사찰 건축은 교리에 의해 결정된다. 화성 시설물은 어떤 위계일까. 방어 취약성을 기준으로 위계가 정해진다. 전쟁시설물이기 때문이다. 방어에 취약할수록 위계를 높였다. 방어력을 더 집중하거나 더 강화해야 할수록 위계가 높다는 의미다. 이를 의궤 도설 편에 기록 순서로 남겨놨다. 의궤 기록은 문에서 시작해 성신사로 끝난다.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은 문이다. 성을 공격할 때 문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문, 암문, 수문, 은구를 맨 앞에 기록하고 있다. 모두 성의 안과 밖이 뚫린 개방형 시설물이기에 가장 높은 방어력이 필요하다. 위계가 높은 이유다. 반면 치, 포사, 성신사는 맨 끝에 기록했다. 치는 돌출됐을 뿐 원성과 같고 포사와 성신사는 성과 멀리 떨어진 성안에 위치한다. 방어력이 덜 필요하다. 위계가 낮은 이유다. 똑같은 위계인데도 북옹성이 16개, 남옹성이 12개이고 북성적대가 3개, 남성적대는 2개다. 이 또한 ‘같은 위계 안의 위계’다. 북쪽을 남쪽보다 더 취약한 곳으로 봤다. 남쪽 동래보다 북쪽 의주에 더 중점을 뒀음을 의미한다. 화성의 현안 설치 수량을 알아보며 현안 수에도 엄격한 위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위계가 방어의 취약성을 기준으로 했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은 현안 설치 수량 결정 기준을 살펴보며 위계를 철저히 지킨 정조의 엄격함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뜨거운 물과 기름으로 공격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현안은 뜨거운 물과 기름, 돌덩이 등으로 공격하는 시설이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있다. 오늘은 현안의 공격 수단과 기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현안은 왜 생겼을까. 현안을 설계하게 된 발단은 여장의 총안이다. 총안은 성 밖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지만 한계가 있다. 성 가까이 접근한 적은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 현안도설에 “유직무우(有直無迂), 즉 사람의 눈은 직선으로만 볼 수 있지 휘어 꺾어 볼 수 없다”라는 말이다. 총안으로는 적병이 성벽 밑에 바짝 붙어 성벽을 헐거나 성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설치해도 사람의 눈으로는 시선을 90도로 꺾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다. 아군이 완전히 은폐하면서 성벽 가까이 도착한 적병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필요했다. 그 수단이 현안이다. 원래 목적이 성벽 바로 아래 적을 보기 위함이라지만 공격과 관련된 기록도 있다. 정약용은 현안도설에서 “현안으로 화살이나 돌, 총 등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석총통(矢石銃桶) 즉 화살, 돌, 총이라는 구체적 공격 수단을 제시했다. 정약용은 감시라는 주기능과 함께 공격시설임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의궤는 아니지만 성역의궤 번역본과 함께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도 보자. 여기에 현안을 “성벽 가까이 다가선 적에게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부어 공격하도록 고안된 시설”로 설명하고 있다. 이 용어 해설집에도 공격 수단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책은 화성성역의궤를 연구하는 데 매우 유용한 좋은 자료다. 성역 당시에는 ‘화살, 돌, 총’을,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뜨거운 물, 기름’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안은 과연 공격 시설일까. 거론된 공격 수단을 하나씩 평가해 보자. 사용성과 전투 효용성으로 나눠 살펴본다. 화성은 전쟁 시설물로 전투 효용성을 필히 살펴봐야 한다. 먼저 사용성을 살펴보자. 화살, 돌, 총, 뜨거운 물, 기름은 모두 현안을 이용해 사용할 수 있는 물체다. 별 이의가 없다. 전투 효율성을 살펴보자. 첫째, 화살과 총이다. 이 둘은 짧은 거리에선 직사 무기다. 반면에 현안은 곡선이다. 특히 아랫면이 곡선이다. 현안의 생김새를 고려하면 실패 가능성이 크고 살상범위가 매우 좁다. 더구나 엎드린 상태로 작은 구멍을 통해 아래로 쏘는 자세로는 공격 효과가 거의 없다. 둘째, 돌인 경우다. 현안을 이용하려면 돌 지름이 25㎝ 이내로 매끈한 공 모양이어야 한다. 현안 위 구멍이 지름 30㎝이기 때문이다.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각이 있으면 현안에 돌이 걸리기 쉽다. 현안이 막히면 공격도 못하고 감시도 못한다. 내탁 위에 비치한 돌은 타구나 여장 위로 던지는 것이다. 현안 구멍은 아니다. 현안은 내탁 위가 아니고 치성 전면에 있다. 셋째, 뜨거운 물과 기름이다. 액체이므로 사용에 문제가 없다. 다만 물 보관, 끓이는 데 필요한 공간, 땔감 보관 장소가 내탁 위 혹은 치성 안에 있어야 한다. 운반, 보관, 흘려보내는 도구 등이 필요하다. 치성 위는 건물이 지어져 있어 이를 위한 여유 공간이 없다. 옹성은 더욱 없다. 치를 제외하고 대부분 현안 구멍이 마루 밑에 있어 쏟아붓는 행동도 거의 불가능하다. 정리하면 이론적으로 사용은 모두 가능하나 전투 효율성은 매우 낮게 평가할 수 있다. 적에게 성을 빼앗기느냐 지키느냐의 매우 급한 상황 외에는 실제 사용하지 할 수 없는 수단이다. 그러면 왜 공격 수단으로 문헌에 기록했을까. 그 내심을 살펴보자. 먼저, 뜨거운 물과 기름이 언급된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은 성역의궤 기록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를 번역해 발간할 때 함께 만든 용어집으로 성역의궤나 당시 문헌을 기초로 쓴 내용이 아니고 조선 후기 여러 영건(營建) 의궤들과 대조해 만든 해설집이다. 최근에 만든 자료다. 성역의궤 원문이나 주(註)가 아니라는 의미다. 다음, 물과 기름을 기록에 포함한 것은 천정(天井) 제도에서 따온 듯하다. 천정이란 협축의 원성 위에 설치한 구멍이다. 설치 대상과 위치, 형태가 다를 뿐 역할은 현안과 유사하다. 천정에 대한 설명에 “곧바로 성벽의 아래쪽을 볼 수 있고, 천정을 통해 창으로 아래로 찌르고 똥을 뿌릴 수도 있다”고 했다. 똥(糞·분)도 뿌리는데 물이나 기름도 뿌릴 수 있겠지란 생각에서 해설집에 ‘뜨거운 물과 기름’을 넣은 것 같다. 이와 달리 화살, 돌, 총은 당시 기록이다. 정약용이 “화살, 돌, 총 등을 이용해 공격할 수 있다”고 현안도설에 기록했다. 현안도설은 화성성역의 기본계획인 도설의 일부다. 정약용의 성설과 도설을 일반적으로 화성 설계라 보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설계로 보지 않는다. 정약용의 성설과 도설은 설계가 아니고 설계와 시공을 맡을 사람에게 제공하는 제안서다. 정조의 지시로 만든 ‘발주자 요구사항(O.R)’이 정확한 개념이다. 이런 바탕에서 정약용의 제안을 해석해 본다. 정약용은 본인의 제안서 현안도설에 ‘활용 가능의 나열’에 중점을 둬 강조했다고 본다. ‘활용 가능’이 아니다.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실전 투입에는 뜻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면 정약용의 제안서는 거짓인가. 거짓이라기보다 의도적이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정약용은 여러 활용 가능한 공격 수단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무슨 의도였을까. 자신이 제안하는 현안이 채택되길 바라는 의도였다. 건축주 정조와 설계와 시공을 담당할 감동당상 조심태다. 정약용은 ‘여러 공격 수단’을 먼저 정조를 향해 ‘현안 마케팅(현안 팔이)’ 수단으로 활용했고 다음으로 조심태를 향해 ‘임금님 마케팅(임금 팔이)’을 한 것이다. 여러 공격 수단을 나열한 후 ‘참으로 좋은 방법입니다’란 미사여구로 제안서를 마무리한다. 결국이 제안은 임금도, 감동당상도 받아들인다. 실제로 옹성과 모든 치성에 다산의 제안과 똑같이 현안을 설치했다. 정약용의 마케팅은 성공했다. 다산의 화성 성역 제안서인 현안도설 중 공격 수단에 대해 살펴봤다. 오늘은 자기 제안의 ‘채택과 실현’이라는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 젊은 시절 정약용의 마케팅 마인드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암문 여장은 왜 둥근 모양일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방화수류정에서 용연으로 가려면 북암문을 통해 내려간다. 북암문 여장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크고 둥근 모양이다. 둥근 모양이어서 원여장이라 칭한다. 동암문도 원여장이다. 여장이란 성 위에 쌓아 올린 ‘작은(女) 담(墻)’을 말한다. 병사가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시설이다. 화성에선 원성 여장 높이는 5척, 1타 길이는 20척을 기준으로 한다. 두 원여장을 보자. 높이는 북암문 원여장이 2.4m, 동암문이 2.2m다. 원성에 설치한 여장보다 원여장이 북암문은 90㎝, 동암문은 70㎝가 더 높다. 길이는 암문 규모에 맞춰 3.2m 전후다. 암문 여장은 왜 높을까. 이유를 살펴보자. 두 암문의 특징에서 찾아봐야 한다. 하나는 암문은 협축 방식의 성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암문 크기가 곡성 중 가장 작기 때문이다. 첫째, 암문은 협축 형식의 곡성이다. 화성은 모두 내탁 형식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문, 수문, 암문은 협축 형식이다. 협축이라는 구조 때문에 암문 위의 통로를 넓게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넓게 하려면 암문 통로 위를 터널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시공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암문 위 통로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또 암문은 위급 시 문의 폐쇄가 원칙이다. 통로가 넓으면 돌을 내리 쏟아부어 단시간에 문을 폐쇄하는 데 불리하다. 메울 용적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래서 암문 위 여장 뒤가 좁을 수밖에 없다. 북암문 위 통로는 1.5m, 동암문은 1.8m로 매우 좁다. 이에 비해 암문 양옆 원성의 내탁부 통로는 폭이 8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폭이다. 방어력은 내탁 공간 크기에 비례한다. 전투 시 많은 병사와 무기를 비축하고 이동도 원활하기 때문이다. 암문 위 좁은 통로에서 생기는 방어의 약점을 보완할 대안은 없을까. 당시 장인은 내탁이 좁은 대신 여장 높이를 늘리는 설계를 했다. 북암문은 여장 높이를 5척에서 8척으로 늘렸고 동암문은 5척에서 7척3촌으로 늘렸다. 각각 90㎝, 70㎝ 높인 것이다. 수평 공간의 불리함을 수직 공간으로 보완한 셈이다. 둘째, 암문은 화성에서 가장 작은 시설물이다. 규모가 겨우 1보 정도로 가장 작은 곡성이다. 규모는 작아도 기본 구조는 꼭 있어야 한다. 바닥, 문, 벽, 개판이 필수 구조다. 개판 위에는 흙을 덮고 벽돌을 깐다. 이 벽돌 윗면이 암문 위 통로 부분이다. 통로 아래 바닥 레벨에서 구조 높이를 더하면 암문 위 통로 바닥 레벨이 된다. 이것이 더 높일 수도, 더 낮출 수도 없는 암문 위 통로의 레벨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통로 바닥 레벨이 좌우 원성 내탁 레벨보다 높다. 북암문이 60㎝, 동암문이 40㎝ 높다. 그래서 북암문에는 좌우 내탁에서 두세 계단을 뒀고 동암문은 경사로로 처리했다. 병사가 좌우로 다니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좌우 통로는 문제가 해결됐으나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여장 높이다. 암문 위 통로에 병사가 서 있을 경우 상체 전부가 적에게 노출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암문 위 바닥 레벨이 높기 때문에 그 위에 병사가 서면 당연히 여장 위로 병사가 노출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여장 기능 중 은폐 기능을 상실한다. 은폐 기능을 살리는 대안으로 여장의 높이를 늘려야 했다. 북암문에서 90㎝를 늘여 2.4m로, 동암문은 70㎝를 늘여 2.2m 높이의 여장을 만들었다. 바닥 레벨 차이가 60㎝, 40㎝인데 90㎝와 70㎝를 늘였다. 왜 30㎝를 더 높였을까. 오성지 때문이다. 나무 문짝 위에 설치하는 오성지를 암문 위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오성지 크기가 높이 1척, 즉 30㎝다. 30㎝만큼 높이를 더 추가했다. 정리하면 협축 구조여서 여장 뒤 바닥 공간이 작아져 취약해진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여장 높이를 높인 것이다. 또 암문 위 바닥 레벨이 높아져 병사가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장 높이를 높인 것이다. 그렇다면 높이만 높여 사각 여장으로 하지 왜 둥근 여장으로 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략적 이유이다. 감시 범위의 확장이란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필자는 같은 높이로 사각 여장과 원여장의 각각의 가시각을 계산해 비교해 봤다. 가시각이란 병사가 성 밖 적을 보는 범위 각도를 말한다. 가시각은 감시 범위와 같다. 여장 두께 85㎝, 인접한 비예와의 사이 간격은 맨 아래가 30㎝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맨 아래가 아닌 병사의 눈높이에서 계산해 봤다. 인접한 비예와의 간격은 사각 여장일 경우 30㎝, 원여장일 경우 70㎝의 공간이 생긴다. 비예는 수직이다. 병사가 성 밖을 보는 공간 폭에 차이가 생긴 이유는 원여장이 원 모양 곡선이므로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기 때문이다. 가시각으로 계산하면 사각 여장일 경우 40도, 원여장일 경우 80도로 계산된다. 병사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한 수치다. 같은 높이인데 사각형을 원형으로 바꾸니 가시각이 2배가 됐다. 둥근 형태가 2배의 확장 효과를 얻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열린 공간이 넓어지는 원형 곡선의 특성을 이용한 설계다. 지혜로운 설계다. 비좁은 통로 때문에 병사를 많이 배치하지 못하지만 감시 범위를 넓혀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이다. 둘째, 인문적 이유다. 원여장에는 정조의 백성 사랑이 숨어 있다. 백성이 ‘찾기 쉽고’,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다. 화성 암문은 평시에 성 밖 백성이 쉽게 사용하라고 만든 문이다. 주로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하층 백성이다. 상공업을 중시한 정조는 하층 상공인의 자부심을 높여 주려 고급 자재인 벽돌을 사용했고 크고 둥근 원여장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성 밖 마을에서 성안으로 드나드는 최단 거리 지점에 암문을 설치했다. 정조의 백성 사랑은 실천이었다. 정리하면 암문의 태생적 구조에서 오는 약화된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여장 높이를 높였다. 함께 사각형에서 원형으로 바꿔 감시 범위를 2배로 늘렸다. 오늘은 암문 원여장 설계에서 ‘형태는 기능을 지배한다’는 건축 격언의 실체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선암산은 왜 무방비로 뒀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의궤에 화성의 국면을 ‘만년의 금성탕지’로 평가하고 있다. 방어하기에 좋고 안전한 화성이란 말이다. 하지만 화성에도 방어에 취약한 곳이 있다. 팔달산 남쪽 능선, 숙지산, 구산, 선암산 등 네 곳이다. 공통점은 화성 성 밖이고, 화성과 가까운 곳이고, 화성 여장 높이보다 높다는 점이다. 화성으로는 눈엣가시 같은 곳이다. 물론 정조도 당시에 이에 대한 대책을 화성 설계에 반영했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는 용도(甬道)를 설치하고 구산과 숙지산에는 돈대를 세웠다. 모두 성 밖에서 매복, 척후, 경보의 역할을 하는 시설물이다. 그런데 단 한 곳 선암산에는 그 어떤 대책도 하지 않았다. 미스터리다. 요즘도 연구가는 선암산과 화성 사이에 용도를 설치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용도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선암산은 동북공심돈 맞은편 산이다. 창룡문 사거리에 있는 높은 산을 말한다. 성 밖 이곳에 올라서면 화성 내부 전체를 볼 수 있다. 화성 요해처다. 적이 이곳을 점거하면 화성 전체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선암산과 화성 사이는 산의 맥이 연결됐지만 능선은 아래로 내려간 후 다시 화성 쪽으로 오르는 지세다. 즉, 둘 사이가 푹 꺼져 있는 형상이다. 용도 설치가 불가한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지형 측면이다. 이런 지형은 용도 입지에 맞지 않는다. 용도의 기본 조건은 용도가 주변보다 높아야 한다. 가능하면 전체가 수평이어야 한다. 한 예로 화성 용도를 보자. 팔달산 용도는 3면이 주변보다 높고 전 구간이 수평이다. 그야말로 용도 터의 정석이다. 용도란 성이 없고, 낮은 담장만 있다. 주변 지형이 한 곳이라도 용도보다 높다면 적이 용도 안을 샅샅이 볼 수 있다. 수평면이 아니고 오르락내리락한다면 올라간 부분에서 낮은 곳을 모두 보게 된다. 매복과 척후라는 기본 기능을 못 한다. 오히려 적의 공격 포인트가 돼 성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가 될 뿐이다. 다음은 시공 측면이다. 이런 지형에 용도를 설치하려면 푹 꺼진 지형을 인공적으로 수평으로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흙을 다져가며 쌓는 것과 돌로 양쪽을 높게 성을 쌓는 방법이다. 당시는 삽, 괭이, 우마차, 인력만을 사용해야 했다. 흙과 돌을 쌓아 산을 만드는 것은 시공과 안전에 적합하지 않다. 용도는 당시 여건으로는 시공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종합하면 지형과 시공성이 용도 기본 요구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암산을 적에게 내 주자는 말인가. 아니 화성의 절반을 그냥 포기한단 말인가. 전략가 정조에겐 어림없는 얘기다. 정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두 가지 대안을 이미 마련해 놓았다. 첫 번째 대안은 동북공심돈 배치다. 선암산 맞은편 화성 동북성에 동북공심돈을 배치했다. 동북공심돈은 남공심돈, 서북공심돈을 지으며 파악한 약점을 보완해 만든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공심돈이다. 건축 특징은 원돈(圓墩), 중잡(重匝), 성탁지내(城托之內), 세 가지로 압축된다. 원돈은 원통형의 돈이고, 중잡은 벽을 외원과 내원으로 만든 두 겹 구조를 말한다. 성탁지내란 돌출된 인공지반인 치성에 세운 것이 아니라 성안 원지반에 지었다는 의미다. 이런 설계의 목적은 오로지 맞은편 선암산에 대한 맞춤형 방어였다. 하나는, 선암산보다 높아야 했다. 선암산을 점거한 적의 동향을 알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넓은 선암산을 감시하려면 감시 사각지대를 없애야 했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려 원지반 위에, 이중 구조로, 원통형 구조로 설계한 것이다. 치성 위 인공지반은 작은 규모만 지을 수 있고 사각형은 사각지대가 반이 넘었다. 높고, 넓고, 둥글고, 튼튼한 구조를 위해 원통형, 이중 벽체, 원지반으로 설계해야 했다. 동북공심돈을 중심으로 동북노대와 동장대를 좌우에 배치했다. 모두 최강의 전력이다. 동장대는 병사 훈련장을 갖춘 대량의 병력이 있는 곳이고 동북노대는 쇠뇌를 쏘는 임무 외에 경보의 역할도 맡겼다. 그래서 동북노대가 화성 치성 중 가장 높게 만들었다. 목표는 선암산 맞대응이었다. 동북공심돈은 정조의 정면돌파 전략이다. 두 번째 대안은 역참 영화역의 설치다. 동북성 밖에 설치했다. 정조는 “동성 밖은 인가가 드물고 광교산과 깊은 계곡이 화성으로 오는 지름길이므로 영화역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말죽거리 양재역을 옮겨 선암산 아래에 영화역을 설치했다. 준공 1년 전이다. 양재역을 뜯어 옮길 정도면 정조의 화성 사랑을 알 수 있다. 영화역과 선암산 방어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역참이 들어서자 모텔, 택시, 유흥 주막, 편의점, 집이 순식간에 생겼다. 뉴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뉴타운은 마을 사람 전체가 자연스레 척후, 정탐, 경보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의 전쟁은 적이 화성을 향해 오고 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 치르는 형태다. 압록강을 넘고, 동래에 상륙한 후 여러 날이 지나야 화성에 도착하는 형태다. 따라서 당시에는 척후, 정탐, 경보 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가 먼저 보느냐의 싸움이다. 이것은 겉에 보이는 직접적 효과다. 정조가 내심 노린 것은 다른 데 있다. 선암산 아래에 뉴타운이 생기면서 선암산은 동네 앞산으로 바뀌었다. 은밀한 침투로에서 은밀함이 사라진 선암산이 됐다. 침투로 기능을 잃었다는 의미다. 은밀한 침투 루트가 번잡하고 개방된 동네 앞산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은밀함의 무력화다. 영화역은 정조의 간접적 우회 전략이다. 정조는 선암산에 용도를 설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안으로 정조는 선암산 맞은편에 대형 동북공심돈을 설치하고 성 밖 선암산 아래에 영화역을 설치했다. 동북공심돈 설치는 선암산 맞대응으로 정면 돌파이고 영화역 설치는 선암산 간접 대응으로 우회 전략이다. 둘의 목표는 화성 두 번째 요해처 선암산의 무력화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왜 선암산에 돈대를 세우지 않았을까. 돈대는 공사비, 공사 기간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정조의 깊은 뜻이 있다. 그 뜻은 추후로 약속드린다. 오늘은 선암산 무대책에서 정조의 정면 대응과 우회 대응 전략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현안은 어느 시설물에 설치할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서문을 성 밖에서 보면 반원형 서옹성과 높은 서북공심돈이 보인다. 옹성과 공심돈의 벽면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파인 긴 홈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현안이라 한다. 현안도설에 “현안이란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성의 부속 장치다”라고 기록돼 있다. 성 바로 앞까지 접근한 적을 감시하는 것이 주기능이다. 이런 현안을 어느 시설물에는 설치했고, 같은 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설물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현안은 어느 시설물에 설치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을 풀어볼 예정이다. 현안 설치대상으로 현안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다. ■ 현안 설치 유무…시설물의 정체성과 관련 정조는 화성성역 착공 2년 반 전 정약용에게 성역에 필요한 기본계획 작성을 지시한다. 1년 후 ‘성설’을, 다시 6개월 후 ‘도설’을 완성한다. 성설은 성 쌓기에 대한 기본계획이고, 도설은 옹성, 현안, 오성지, 거중기, 그리고 시설물 선축에 대한 기본계획이다. 이 중 성설은 정조가 만든 “어제성화주략”이란 이름으로 공포한다. 의궤에는 현안 설치대상 시설물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현안에 대한 것은 의궤가 아닌 도설 중 현안도설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정약용은 현안도설에 “옹성과 모든 치성의 앞면에 현안을 각각 몇 개씩 설치합니다”라고 제안한다. 간단명료하다. 현안을 설치할 시설물 대상 기준은 ‘옹성’과 ‘모든 치성’이다. 설치 수량 기준은 각각 몇 개씩이고, 설치 위치 기준은 치성의 앞면이다. 준공도서인 화성성역의궤 내용과 실제 화성을 살펴보면 정약용의 제안을 철저히 따른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옹성과 모든 치성’에, ‘전면’에 현안을 설치했다. 시설물 별로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옹성 4곳이다. 북옹성, 남옹성, 동옹성, 서옹성이다. 모두 현안을 설치했다. 다음, 치성 21곳이다. 치성은 적대 4곳, 포루(군졸) 5곳, 치 8곳, 그리고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봉돈, 동북노대로 21곳이다. 따라서 현안을 설치한 시설물은 옹성 4곳과 치성 21곳으로 모두 25곳이다. 옹성과 치성에는 하나의 예외 없이 제안대로 정확히 설치했다. 화성에 시설물 수가 60곳이므로 비율로는 전체 시설물의 42%가 되는 셈이다. 거의 반에 육박한다. 문제는 같은 시설물 중 현안을 설치하지 않은 시설물에 있다. “이 시설물에는 왜 현안을 설치하지 않았느냐?” “설치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이다. 현안을 설치하지 않은 시설물과 그 이유를 밝혀본다. 대체로 시설물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이래서 의궤 해석에 정확한 정의가 중요한 것이다. 첫째, 포루(대포) 5곳에 현안이 없다. 포루는 성에서 돌출된 전체를 벽돌로 지은 시설물이다. 성 밖 지면에서 성 높이까지 내부를 비워서 대포를 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화성 시설물 전체에서 지하를 사용하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또한, 내부 전체를 사용하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지하 사용이라 한 이유는 성에서는 성안 내탁 위를 기준으로 그 위는 지상, 아래는 지하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와 기능에는 현안이 불필요하다. 지하를 활용하는 시설물이므로 ‘성 아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려다볼 필요 없이 성 밖 전체를 바로 볼 수 있다. 포혈은 포 쏘는 구멍, 감시하는 구멍, 채광창 역할을 한다. 수많은 포혈이 현안의 역할을 겸하므로 포 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전방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포루는 치성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포루는 외형만 같을 뿐 치성과 완전히 다르다. 치성의 제도는 철부성면, 고여성제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포루와 이 조건을 비교해 보자. 첫 번째 ‘철부성면’은 “철(凸) 모양으로 성면에 잇대어 붙어야 한다”이다. 포루는 충족하지 못한다. 이유는 원성에 잇대어 붙인 것이 아니라, 덧붙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포루는 치성처럼 돌출된 부분이 잡석으로 차 있지 않고 내부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고여성제’는 “높이가 원성과 같아야 한다”이다. 포루는 높이가 원성보다 높은 처마 밑까지이다. 두 조건 중 하나도 충족하지 못해 포루는 치성으로 보지 않는다. 둘째, 문 11곳에 현안이 없다. 문 4곳, 수문 2곳, 암문 5곳을 말한다. 문도 치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문은 앞에 옹성이 있으므로 현안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수문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 현안을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쇠살문을 설치하여 전시에는 모든 홍예 수문을 폐쇄했다. 암문은 위급 시 묻어버리도록 설계가 되어있어 현안이 필요하지 않다. 특히 모든 문은 원성에서 돌출된 형태가 아니라서 현안이 불필요하다. 셋째, 지 3곳, 은구 2곳, 용연 등 6곳이다. 이 시설물은 물과 관련된 시설물로 현안을 설치할 수도, 설치할 필요도 없는 시설물 유형이다. 끝으로, 서노대, 동북공심돈, 장대 2곳, 각루 4곳, 서노대, 동북공심돈, 포사 3곳, 성신사, 용도 등 13곳에도 현안이 없다. 이 시설물은 “재성신지내(在城身之內) 시설물”, 즉 성안에 있는 시설물이다. ‘성안’이란 위치와 ‘치성 위’란 위치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성안은 자연 원지반이고, 치성 위는 치성 인공지반을 말한다. ‘지상축(地上築)’과 ‘치상축(雉上築)’으로 분류한다. 원지반은 돌출된 성이 아니므로 현안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현안을 설치하지 않은 시설물과 그 이유도 살펴봤다. 지금과는 거꾸로 현안을 설치하지 않아야 할 곳에 설치한 특이한 곳도 있다. 모두 원성에 설치한 경우로 위치만 소개한다. 북암문 좌우 원성에 각각 1개씩, 서북각루 전면 원성에 2개가 있다. 그리고 팔달산 정상 서장대를 둘러싼 원성에도 독특한 모양의 현안이 있다. 크기가 크고, 가로로 긴 모양을 하고, 아래위로 설치돼 있다. 현안 설치대상 시설물을 살펴보며 느낀 점은 ‘설치할 수 있다면 모든 시설물에 설치하는 시설’이라는 점이다. ‘성안, 통과하는 문, 지하 공간 이용, 물’ 등 설치할 수 없는 곳, 설치할 필요가 없는 곳을 제외하고 모두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성역 당시 방어 수단으로 현안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화성성역 100여 년 전 류성룡은 현안은 또 하나의 치성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안 설치대상 시설물에서 정조의 전략적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치(雉)의 ‘설계 최소면적’은?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설계에는 설계 기준이 있다. 최소치, 최대치, 표준치다. 수원화성을 지을 당시 적용됐던 설계 기준을 찾아보자. 장인들 간 입으로 전해진 치의 설계 최소 면적은 얼마일까. 수원화성에 설치한 시설물은 19종류에 60개다. 각각 주어진 목적과 기능을 갖고 방어에 임한다. 이 중 치는 외관상 가장 보잘것없지만 모든 시설물 중 기본 방어시설이다. 적이 성벽에 가까이 붙게 되면 성에서 방어가 매우 어렵다. 성 위에서는 가까이 접근한 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출된 좌우로 마주하는 치’에서 적의 옆구리를 협공하면 적들도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치의 주기능이다. 화성에는 순수한 치가 여덟 곳이 있다. 여기에 사실상 치의 역할을 하는 여덟 곳을 포함하면 모두 16곳이 된다. ‘순수한 치’는 동1치, 동2치, 동3치, 서1치, 서2치, 서3치, 남치, 북동치 여덟 곳을 말한다. 사실상 치는 포루(군졸) 다섯 곳에 남공심돈, 서북공심돈, 동북노대를 합해 여덟 곳이다. 치의 규모는 의궤에 치의 둘레 길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둘레길이란 성 밖으로 돌출한 좌측면, 바깥면, 우측면, 3면의 길이를 합한 길이다. 그러나 아군 병사가 실제 사용하는 면적은 여장 안의 면적이 된다. 설계에는 공간마다 설계 최소 면적이 있다. 그 공간에 필요한 최소 면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비즈니스호텔의 욕실, 대학 기숙사의 1인실, 종합병원 2인실 병상 등의 최소 소요면적을 의미한다. 성역 당시 수원화성에 적용한 설계 최소 소요면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의궤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기록은 없지만 당시 감동이나 장인들 사이에 전해지던 설계 기준은 있었다고 확신한다. 치성의 최대 돌출길이, 홍예문의 최저 높이 등이다. 오늘은 화성에서 치의 설계 최소 면적, 최소 소요면적은 얼마일까. 성역 당시 장인들의 기준을 찾아볼 예정이다.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치 8개 중 남치와 서삼치에 대한 아주 특별한 기록이 있어 가능하다. 의궤 기록에서 시작해보자. “서삼치는 여장 양쪽 끝이 원성 안으로 3척이 들어갔다”, “남치의 여장 제도는 서삼치와 같다”는 기록이다. 실제로도 서삼치와 남치는 모양이 특이하다. 여장이 성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왜 성안으로 여장이 들어왔을까. 성안으로 들어온 여장 길이만큼 내탁 너비가 좁아지게 된다. 내탁 사용에 지장이 크다. 내탁에 지장을 주면서 여장을 늘린 것은 아군 병사가 사용할 치의 내부 면적이 부족해 공간을 늘리는 대책이었다. 성안 쪽으로 면적을 확장해 부족한 치의 사용 공간을 늘려준 것이다. 서삼치와 남치를 올라보면 누구나 “폭이 왜 이리 좁아” 또는 “이 면적으로 뭐 할 수 있겠어”라고 하게 된다. 왜 이렇게 작은 면적의 치를 만들었을까. 이유는 서삼치와 남치가 설치된 위치의 지형이다. 성 밖 쪽의 지형을 보면 전후좌우 모두 급경사 지형이다. 이런 경사 지형에는 돌출 길이를 길게 할 수 없다. 이런 급경사에는 좌우 폭을 넓게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규모가 작아지고 실 사용 면적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위치에 꼭 배치해야 했다. 또 치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 면적은 확보해 줘야 했다. 대안은 없을까. 위치도 살리고, 최소 면적도 살리는 방법으로 정조는 여장을 성안으로 연장해 면적을 늘려 최소 소요면적을 확보해 준 것이다. 이젠 최소 소요면적을 찾아보자. 먼저 치의 규모를 살펴보자. 큰 규모부터 북동치 20보, 동삼치 17보, 동일치 17보, 서일치 16보 1척, 동이치 16보, 서이치 14보 5척, 서삼치 14보 4척, 남치 14보 2척이다. 가장 큰 치는 북동치이고 가장 작은 치는 서삼치와 남치다. 실사 용면적을 살펴보자. 순내부 면적은 큰 면적부터 북동치가 10.5평, 동삼치 10.2평, 동이치 7.7평, 동일치 7.7평, 서일치 6.6평, 서이치 5.5평, 서삼치 4.1평, 남치 4.1평 순이다. 서삼치와 남치는 확장 이전 면적이다. 북동치가 가장 큰 면적이고 서삼치와 남치가 가장 작은 면적이다. 같은 치이지만 가장 작은 서삼치는 가장 넓은 북동치의 반도 안 된다. 이 데이터에서 중요한 것은 서삼치와 남치의 실사용 면적이다. 모두 4.1평이다.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서삼치와 남치의 4.1평은 치의 최소 소요면적에 미달한다는 의미다. 미달하기 때문에 이 두 치는 여장을 성안으로 들여오면서 면적을 확장한 것이다. 둘째, 서이치 5.5평은 치의 최소 소요면적에 충족한다는 의미다. 충족하기 때문에 서이치까지는 여장을 확장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면 최소 소요면적은 얼마일까. 서삼치와 남치의 확장 후 면적을 계산하면 된다. 얼마만큼 늘렸을까. 의궤에 “여장 양쪽 끝이 원성 안으로 3척이 들어갔다”고 했다. 늘린 길이는 3척으로 0.93m이고 늘어난 면적은 2.3㎡로 0.7평이다. 늘어난 면적을 합하면 서삼치와 남치는 4.8평이 된다. 즉, 치의 최소 소요면적은 4.8평이다. 결론은 ‘성역 당시 치의 설계 최소 면적은 5평(坪)’라 할 수 있다. 기록은 없지만 당시 장인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고 적용되던 설계 기준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 성안으로 여장을 끌어들이면서까지 치의 최소 소요면적 기준을 지키려 노력한 장인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오늘은 성역 당시 장인이 적용한 설계 기준을 알아봤다. 위계가 가장 낮은 시설물이지만 남치와 서삼치에 면적을 늘려 최소 소요면적을 지켜준 정조의 엔지니어링 마인드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화성행궁 안 구경 : 정조의 휴식·수양공간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지금까지 화성행궁을 왕실 행사 공간, 지방행정 공간으로 구분해 홍보했다. 정조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잘못된 구분이다. 한양 궁궐에는 수많은 공간이 있다. 수백년 동안 여러 임금에 의해 확장됐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화성행궁은 한 명의 임금에 의해 완성된 궁이다. 오롯이 정조의 생각이 담긴 공간이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휴식, 수양, 어머니와의 추억, 백성과의 기억’이 담긴 공간이다. 이번엔 노후를 위한 휴식 공간, 수양 공간을 본다. ■ 휴식을 위한 아름다운 공간: 노래당, 후원, 득중정지, 미로한정 젊을 때 열심히 일하고 은퇴 후 충분히 쉬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양이다. 정조도 쉼을 위한 공간을 준비했다. 첫째, 노후에 중심 거처로 사용할 노래당(老來堂)이다. 노래당은 낙남헌의 뒤편에 위치해 동향한 건물이다. 노래당을 중심으로 뒤편에 정자(미로한정)를, 앞쪽에 정원(득중정지)을, 좌측에 백성(낙남헌)을, 우측에 어머니(장락당)를 둔 공간 배치다. 행궁 북쪽 구역의 중심이고 노후 생활의 중심 공간이다. 노래당의 공간 특징은 노후 생활 공간의 중심에 있는 점, 행궁에서 유일하게 홍예문을 설치한 점, 정전인 봉수당이나 어머니 침전인 장락당도 단청을 하지 않았는데 단청을 한 점이다. ‘노래’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라는 시에서 따왔다. 편액은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인 채제공이 썼다. 노래당으로 통하는 문의 이름은 난로문(難老門), 가풍문(歌風門), 득한문(得閒門), 삼수문(三壽門)으로 모두 늙지 않고 한가한 쉼을 희망하는 정조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둘째, 연못 득중정지(得中亭池)가 있는 후원이다. 소박한 규모이나 품격 있게 조성해 놓았다. 행궁 뒤에서 시작한 명당수를 중간에 연결해 취병 안을 지나 연못을 거쳐 나간다. 지형의 고저 차를 이용한 자연 급수 시스템으로 친환경 설계다. 취병이란 관목과 넝쿨식물로 만든 자연 식물 울타리(Hedge Wall)를 말한다. 두께는 50㎝ 정도이고 높이는 사람 키를 약간 넘는 정도라 외부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게 했다. 상당히 세련된 조경 공간이다. 현재 발굴조사를 마친 상태다. 복원된다면 정조의 품격을 느낄 또 하나의 공간이다. 세 번째 휴식 공간은 정자인 미로한정(未老閒亭)이다. 위치가 행궁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먼 곳에서도 정자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정자에 올라서면 눈 아래 행궁의 수많은 지붕이 장관을 이룬다. 미로한정에 올라 꼭 보기 바란다. 이름 ‘미로한’은 ‘장차 늙어서 한가하게 쉰다’란 의미다. ■ 몸과 정신을 수양하기 위한 공간: 득중정, 외정리소, 봉수당 누상고 휴식만으로 노후를 보낼 정조가 아니다. 문무를 겸한 임금으로 노후에도 몸과 마음을 계속 수양하려 했다. 국내외 서적을 늘 읽을 수 있고 본인의 글을 저술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화성행궁 내 공간이 이를 증명한다. 첫째, 몸과 정신수양을 위한 활터 득중정(得中亭)이다. 득중정은 노래당의 서쪽에 위치해 북향을 하고 있다. 특징은 행궁 대부분이 동향인데 득중정과 낙남헌만 북향을 한 점이다. 이유는 과녁까지의 긴 공간이 필요했고 많은 백성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위치와 너른 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화성능행도 중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가 이를 증명한다. 득중정 행사를 그린 것으로 정조가 활을 쏜 후 저녁에 어머니는 물론이고 수많은 백성과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모습이 보인다. 백성에게 공개된 행궁이다. 수원화성에는 활터가 행궁 북쪽 강무당, 행궁 안 득중정, 용연 위 방화수류정, 창룡문 맞은편 동장대 등 모두 네 곳이다. 수원이 활터를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일 것이다. 득중정에는 활을 쏘는 어사대가 있고 정조 친필의 편액이 걸려있다. ‘득중’은 “활을 쏘아 맞히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못 맞히면 될 수 없다”는 예기(禮記)의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둘째, 저술을 위한 외정리소(外整理所)다. 정리소는 왕의 원행을 위한 계획부터 시설, 인력, 의례, 교통, 물자, 회계, 기록 보존까지를 전담하는 통합기구다. 기록 보존도 정리소 임무 중 하나다. 실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외정리소에서 담당해 만들었다. 이때 30만자의 새 활자 ‘정리자’를 주조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저술 작업에 필수적인 기관이다. 성역이 완료된 후에도 외정리소를 화성행궁에 그대로 둔 점에서 집필에 대한 정조의 뜻을 알 수 있다. 셋째, 서고로 사용할 봉수당 내 누상고(樓上庫)다. 누상고란 행각을 2층으로 만들어 지상에서 떠 있는 2층 부분을 창고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 2층 부분 창고를 말한다. 즉, 누상고는 종이류나 습기를 피해야 하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창고다. 외정리소 대부분이 누상고인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종이를 보관하거나 대체로 서고가 된다. 이런 누상고를 정전인 봉수당에 설치한 것이나 봉수당 행각 대부분을 누상고로 만든 점에서 수많은 책을 가까이 하려는 정조의 뜻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저술을 위해 외정리소를 화성행궁에 남겼고 많은 서적을 접하기 위해 서고로 활용하고자 정전 가까이 많은 누상고를 설치한 것이다. 정조는 노후에도 학문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외정리소의 화성행궁 존치와 봉수당 행각의 누상고 설치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왕의 은퇴를 계획하고 화성행궁에 노후를 준비했다. 화성행궁 안의 전각 공간을 통해 마음(文)과 몸(武)의 휴식과 수양을 위한 정조의 노후 계획은 이러했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화성행궁 뒷산 내포사에 매달린 목어의 비밀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 시설물에 포사가 있다. 모두 세 곳이다. 작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설물이다. 화성행궁 뒷산에 내포사와 그곳에 매달린 목어의 비밀을 풀어본다. 수원화성에 군사시설 같지 않은 시설물로 포사가 있다. 의궤에 “치 위에 지은 집을 포루(舖樓)라 하고, 성안에 지은 집을 포사(舖舍)”라고 기록했다. 화성에는 서남포사, 중포사, 내포사 세 곳이 있다. 서남포사는 서남암문 위에 있어 ‘치 위’도 아니고 ‘성안’도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성안의 집’에는 중포사와 내포사만 해당한다. 서남포사는 서남암문 위에 있고 중포사는 미복원인데 팔달구청에서 보이는 언덕 위 삼일고교 끝 건물 위치다. 내포사는 화성행궁 뒷산에 있다. 세 곳 포사에 대한 의궤 설명에서 공통된 점을 보면 위치가 높은 곳인 점, 온돌이 있는 점, 단청에 3토를 사용한 점, 대들보 위에 회를 바른 점이 특징이다. 건축 특징에서 포사의 업무와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첫째, 높은 곳이어야 업무를 수행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 둘째, 추운 겨울이나 밤에도 쉬지 않고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 셋째, 담당 책임자는 계급이 높은 군인이라는 점이다. 포사의 기능이나 역할은 무엇일까. 서남포사에 대해 의궤는 “높은 곳에 있어 멀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둬 경보를 알리기 알맞다”라고 했다. 또 중포사는 “성 밖에서 길가에 잠복한 자가 경보를 하면, 성의 각 해당 방면에서 포를 쏘아 보고하고, 포사에 있는 군사가 깃발이나 화포로 보고해야 한다”고 돼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포사 세 곳은 맡은 임무에 차이가 있다. 서남포사는 직접 감지하고 직접 보고하는 시스템이고 중포사는 성 밖 잠복자가 감지해 가까운 성 위의 해당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해당 담당자는 중포사에, 중포사는 내포사에 보고하는 시스템이다. 두 곳의 포사는 행궁 뒷산의 내포사로 보고한다. 내포사는 화성부나 장용외영의 책임자에게 최종 보고한다. 이래서 내포사를 행궁 안에 설치한 것이다. 목적은 같지만 보고 체계는 다르다. 보고 도구로는 ‘도설’에 “깃발이나 화포로 보고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임무 수행규칙인 ‘파수절목’에는 불과 횃불이 추가돼 있다. 낮에는 화포와 깃발을, 밤에는 화포, 불, 횃불을 사용한다. 화성행궁 뒷산에는 미로한정이라는 정자와 내포사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행궁의 지붕들이 아름답다. 내포사는 포사로 온돌방 한 칸과 한쪽에 벽이 없이 오픈된 반 칸 방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반 칸 방에 절에서만 볼 수 있는 목어가 달려 있는 것이다. 왜 내포사에 목어를 달아 놓았을까. 목어는 법고, 운판, 범종과 함께 절의 사물이다. 법고는 땅에 사는 축생을,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목어는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범종은 28천(天) 모든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의미가 있다. 목어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잠도 자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의미다. 내포사와 목어는 무슨 관계일까. 소리(音)와 관계가 있다. 앞서 말한 화포, 깃발, 불, 횃불 외에 소리도 경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화성을 지키는 규칙 파수절목 중 ‘기계’편에 보면 총, 깃발, 등롱, 기화, 대방, 소방, 깃대를 마련하라 한다. 이 중 방(梆)이 목어다. 의궤 ‘포사에서의 호령’편에는 대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만약 경보를 잘못 울리거나 잘못 전한 경우에는 사점해 처치한다”라 하고 그 방법으로 “밤에는 신포 1발을 놓고, 횃불 한 뭉텅이를 들며, 대방을 쳐서 구분한다”고 기록돼 있다. 신호에 오류가 발생하면 대방을 곁들여 사용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대방(大梆)을 목어로 간주하고 지금의 관리자가 목어를 걸어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과연 대방은 목어를 말할까. 의심이 든다. 필자는 대방은 큰 목탁으로, 소방(小梆)은 나무 딱따기로 본다. 그 근거로 첫째, 전쟁 시설물에 꼭 종교용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 둘째, 한자 방은 ‘목어 방’이 맞지만 ‘소리를 내는 나무 기구’란 의미도 있다. 방은 목어, 목탁, 나무 딱따기 모두를 의미한다. 셋째, 화성의 세 개 포사 중 내포사를 제외한 중포사와 서남포사에는 목어를 걸어 놓을 수 있는 장치나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결정적 근거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자정이 넘으면 야경꾼들이 나무 딱따기를 치며 골목길을 누볐다. 대부분 2층 이내 건물만 있었던 수원 사대문 안은 나무 딱따기 소리도 충분히 전달됐다. 대방은 목탁 종류, 소방은 나무 딱따기 종류로 봐도 무방하다. 포사는 규모가 작고 위계가 낮은 시설물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도 있다. 하나는 행행(行幸), 즉 임금이 행차할 경우 두 곳 포사에 장수 2명과 군사 4명으로 파수하게 하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행행이 있으면 파수할 곳으로 27곳 시설물을 지정하는데 그 안에 포사 세 곳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포사 한 곳에 1명의 장수가 책임지게 하고 60곳 중 27곳 안에 포함된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시설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내포사와 목어에 대해 살펴봤다. 정교하게 제정한 화성 유지 보수 규칙인 수성(修城)절목과 화성 방어 지침인 파수(把守)절목에서 정조의 지속가능한 철학을 엿봤다. 이런 기록들이 수원화성을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시설물로 만들고 있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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