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마법사 전영구 히야, 신기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아 하늘이 보내주는 솜사탕 하얀 솜사탕 하늘엔 마법사가 사나 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하얀 솜사탕 마법사님,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장수하셔요. 아이들의 시선으로 눈이 오면 제일 좋아하는 건 아이들이다.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이다. 어디 뛰기만 하는가. 눈을 받아먹기도 한다. 공해가 없던 옛날엔 그랬다. 이 동시는 눈 오는 날의 아이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솜사탕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엔 마법사가 사나 보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상상력이 귀엽고도 재미있다. 동시는 어린이 눈으로 보고, 어린이 마음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아무나 쉽게 덤벼들 수 없는 게 동시 쓰기다. 성인 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게 쓰더라도 ‘시(詩)니까’ 하고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지만 동시는 금방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다고 한다. 여기에 단순 간결에다 재미까지 있어야 하니 얕잡아 볼 수 없는 게 동시 창작이다. ‘마법사님, 고맙습니다/오래오래 장수하셔요.’ 요 끝 구절이 또 얼마나 아이다운가. 먹어도 줄지 않는 솜사탕을 내려보내 주시는 마법사님에게 감사의 마음과 함께 만수무강을 비는 기도야말로 천생 동심이다. 격주로 연재하는 본란의 동시를 읽고 오랜만에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한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 음성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필자도 행복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눈사람이 나에게 김완기 날마다 하늘보며 기다렸더니 함박눈 내려앉아 동네가 하얗다 누나와 눈덩이 돌돌말아 내 키보다 큰 눈사람 만들었지 눈밭에 뛰놀던 참새가 금빛햇살 물고 와 눈가슴 뛰라고 살포시 포개주는 날 우뚝 선 눈사람이 나에게 빙그레 웃는 이파리 입으로 훌쩍 키가 크는 겨울오누이 되란다. 겨울, 체온이 더욱 그리운 계절 겨울놀이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아무래도 눈사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눈덩이를 굴리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그렇게 해서 만든 눈사람의 얼굴에 모자를 씌우고 눈과 코, 입을 만들어 붙이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이 동시는 누나와 눈사람 만드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아이에게 말을 해준다는 것이다. ‘빙그레 웃는 이파리 입으로/훌쩍 키가 크는 겨울오누이 되란다.’ 오누이, 참 정겨운 어휘다. 가족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 가운데서도 이처럼 포근한 어휘가 있을까 싶다. 시인은 한술 더 떠 ‘겨울오누이’라고 했다. 왜 오누이 앞에 ‘겨울’을 붙였을까. 짐작하건대 추위 속에서 오히려 더 따뜻한 정을 느끼는 사이란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맞다! 겨울은 체온이 더욱 그리운 계절이다. 어디 체온뿐인가. 따뜻한 정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어려운 이웃에 쌀을 보내주고 연탄을 배달해준 이웃들 뉴스는 얼마나 아름답고 훈훈했던가. 새해엔 우리 서로서로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해가 됐으면 참 좋겠다. 여기에 포근한 정까지 주고받는 해가 됐으면 참 좋겠다. 오, 새해여! 군불 같은 새해여! 윤수천 아동문학가
할머니의 나들이 김종상 내 눈 어디 있나? 여기 있어요. 안경! 내 귀 어디 있나? 여기 있어요. 보청기! 내 이 어디 있나? 여기 있어요. 틀니! 내 지팡이 어서 가자 예, 제 손 꼭 잡으세요. 나를 지탱하는 손 나이 들면 외출 한번 하기가 쉽지 않다. 외출복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것 말고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경도 찾아 써야지, 보청기도 귀에 꽂아야 하지, 틀니까지 끼워야 하지, 온 방안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젊은 날엔 후딱 해치웠던 일들이 왜 그리도 서툰지 모르겠다. 이 동시는 새해를 맞은 할머니의 첫나들이 모습을 보여준다. 안경에다, 보청기에다, 틀니까지 챙기느라 온 방 안을 헤맨다. 그러고나서도 챙겨야 할 게 또 있다. 지팡이다. 허약한 몸을 지탱해주는 지팡이 없이는 걸음을 떼기가 겁난다. 이 동시는 그런 일련의 나들이 과정에다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손’이다. 손자는 언제부턴가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다. 할머니가 외출할 눈치라도 보이면 잽싸게 달려온다. 참 예쁜 손자다. 할머니는 손자가 내민 그 ‘든든한’ 지팡이를 잡고 비로소 집을 나서는 것이다. 새해다! 할머니와 손자가 보여주는 이 따뜻한 관계가 우리 사회 전체로 이어졌으면 참 좋겠다. 서로서로 듬직한 지팡이가 돼주자. 각자의 체온도 나눠주고, 마음도 하나로 모으자.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은 서로서로 지팡이가 돼줄 때 이뤄진다. 지팡이 만세! 윤수천 아동문학가
새 달력 이경덕 “아! 1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새 달력을 거는 아빠 맨 먼저 내 생일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내 키는 더 크고, 아빠에겐 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무럭무럭 자라는 꽃들 새해는 언제 오는가. 땅의 새해는 태양이 어둠의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솟아오를 때 오지만 집집마다의 새해는 새 달력을 걸 때 온다. 아이는 아빠가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 달력을 거는 걸 지켜보고 있다. 아빠는 새 달력을 벽에 건 뒤 기억해야 할 날짜에 동그라미를 씌운다. 어느 집이건간에 하는 ‘계획표시’이기도 하다. 아이는 아빠의 손을 주시한다. 아, 아빠의 첫 동그라미 씌우기는 바로 아이의 생일이다. 순간, 아이의 기쁨이 하늘로 치솟는다. ‘내 키는 더 크고/아빠에겐/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아이는 아빠가 더없이 사랑스럽고 고맙다. 시인은 새 달력을 벽에 거는 아빠의 모습과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아이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짚어준다. 자식은 한 집안의 꽃이다. 꽃도 가만히 있는 꽃이 아니라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꽃이다. 아빠 엄마는 이 무럭무럭 자라는 꽃으로 하여 날마다 행복하다. 옛날 부모들이 가난한 시절임에도 칠남매, 팔남매를 낳은 이유도 여기 있지 싶다. 무럭무럭 자라는 꽃들을 바라보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새해엔 우리 사회에도 이 좋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났으면 좋겠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꽃들로 가득 찬 ‘화원’이 됐으면 참 좋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옷 최영재 스카우트 복장을 하면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지. 새로 산 옷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손과 말이 공손해지지. 학교에서 돌아와 집 옷으로 갈아입으면 나도 모르게 우당탕! 이 방 저 방 뛰어다니지. 옷이 사람을 만든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외양이 달리 보인다는 뜻에서 나왔다. 어디 외양뿐인가. 행동거지도 달라지게 돼 있다. 스카우트 복장을 하면 스카우트가 되고, 운동복을 입으면 운동선수가 되고,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 이 동시는 아이와 옷을 연결 지어 생각하게 해준다. 필자의 동화 가운데 옷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노랑 옷을 즐겨 입는 사장님이 그날은 파랑 옷을 입고 회사 안을 둘러본다. 그러자 사원들은 파랑 옷을 입은 사장을 몰라보는 것. 이에 화가 난 사장님은 내가 사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옷으로만 사장 노릇을 했다는 것을.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옷은 어디까지나 장식품이다. 그런데 그 장식품이 사람을 변화시켜 준다. 이 동시가 바로 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옷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 누구나 경험했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업복을 입으면 아무 데나 앉고 싶어지는가 하면 정장을 하면 걸음걸이부터가 반듯하다. 그래서 옷을 ‘의관’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폐타이어 김종상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저렇게 낡아질 때까지 사람을 위해 이날까지 무거운 짐을 받쳐 싣고 매일 바쁘게 달렸겠지 진창길이고 자갈밭이고 가리지 않고 동동걸음으로 숨 가쁘게 일만 하다가 낡았다고 이제 버려져 경로당을 찾는 노인네처럼 썩은 고물들만 모인 자리에 쓰레기로 한몫 끼인 타이어 이제는 갈 곳이 분명한데도 또 무슨 할 일이 주어질까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낡고 위대한 희망 폐타이어는 구멍이 나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타이어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미 타이어로서의 생명이 다한 것이다. 시인은 저 많은 소재를 놔두고 왜 쓸모없는 폐타이어를 노래하는 걸까. 짐작하건대 시인 자신을 폐타이어에 빗대어 쓴 건 아닐까 싶다. 김종상, 그 이름은 한국아동문단의 전설이다. 193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59년 새벗에 동시 ‘산골’이 입상되고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산 위에서 보면’ 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현재까지도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갈 곳이 분명한데도/또 무슨 할 일이 주어질까 하고/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이다. 생명이 다한 폐타이어가 그래도 행여나 또 무슨 일거리가 있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눈물겨운가. 아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일지라도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다는 저 폐타이어 정신! 우리네 인간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삶의 정신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 또한 꼭 필요로 하는 삶의 분위기란 생각이 든다. 아, 이 땅의 위대한 폐타이어들이여, 폐타이어 정신이여! 윤수천 아동문학가
휠체어 김재수 휠체어에 앉은 백발의 할머니를 어린 손자가 밀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밝은 미소로 황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 이제 임무 교대다 손자도 할머니도 얼굴이 환하다. 인생의 바통 터치 휠체어와 유모차를 내세운 할머니와 손자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는 세월이란 강이 있다. 어린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가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신이 휠체어에 앉는 신세가 됐다. 임무 교대를 한 것이다. 임무 교대, 그건 바통 터치다. 타원형의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난 선수가 다음번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 주는 육상경기와 조금도 다름없다. “자, 이젠 자네 차례야! 열심히 달려줘.” “수고했어. 이젠 좀 쉬어.” 육상경기에만 바통 터치가 있는 건 아니다. 인생에도 바통 터치가 있다. 곧 임무 교대다. 할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아버지가 앉고, 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에 아들이 앉고, 아들이 앉았던 의자에 손자가 앉고. 필자는 수원의 성곽 길을 산책하면서 먼저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을 내려다보곤 한다. 수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길. 오늘 필자가 밟고 간 길을 내일은 또 누군가 밟고 지나갈 것이다. 길은 곧 인생이다. 이를 깨닫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손자도 할머니도/얼굴이 환하다.’ 시인은 임무 교대하는 할머니와 손자를 통해 아주 간단하지만 심오한 인생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지금 이 시각 안종완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나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숙제를 미루고 있는, 친구 민서를 부러워하는, 설렁설렁 공부하는, 내가 보인다. 너는 너 자신에게 솔직하니? 너 자신을 믿고 있니? 네가 하는 공부가 재미있니?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이 시각 환한 빛으로 내게 온 나를 찾는 시간이다. 마음속 거울 거울 앞에 서면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마음속에도 나를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 이 동시는 마음속의 거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재미난 동시다. 너 자신에게 솔직하냐고, 자신을 믿느냐고, 공부가 재미있느냐고. 질문의 수준이 퍽 어른스럽다. 시인은 아이를 내세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누구든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 보라고 넌지시 ‘명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란 사람들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 누구에게 딱 말하지 않고 허공에다 대고 하는 말처럼 들리는 소리를 하기 좋아하니까 하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 동시의 해답은 맨 끝 구절에 있다. ‘지금 이 시각/환한 빛으로 내게 온/나를 찾는 시간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다만 어렴풋이 “나는 이런 사람일 거야”라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뿐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이때 ‘남’은 곧 거울이 된다. 내가 나를 보는 것보다 남들이 나를 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거울 앞에 선 아이를 내세워 이를 얘기하려 한 건 아닐까. 윤수천 아동문학가
젤리 할머니 고순례 어느 날 손녀와 만났다 자주 만나지 않다 보니 낯가림하는 손녀 “할머니 손잡고 산책 좀 해!” 엄마의 말에 내 손을 잡은 손녀 “할머니 손이 젤리 같네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난 갑자기 젤리 할머니가 되었다. 손, 따뜻한 안테나 대가족 시대와 달리 요즘엔 어느 집이고 할머니와 손녀가 떨어져 산다. 그러다 보니 끈끈한 정이 없다. 이 동시는 핵가족의 일면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할머니와 손녀 사이가 조금은 서먹서먹하다. 이를 본 엄마가 다리를 놓는다. 그게 손잡는 일이다. 손, 그건 무전기나 텔레비전으로 치면 ‘안테나’나 다름없다. 전파 대신 감정을 느끼게 하는 수신기다. 어릴 적 엄마들은 딸들에게 일렀다. 사내들한테 함부로 손 주지 말라고. 손 한 번 주면 나머지 것도 하나씩 주게 된다고. 손은 그만큼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래서 예전엔 제아무리 친해도 남녀 간에 손 잡기를 꺼렸다. 손은 ‘전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할머니 손이 젤리 같네요.” 할머니의 손을 잡아본 손녀의 이 말은 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난 갑자기 젤리 할머니가 되었다.” 손녀와 할머니는 손을 잡음으로 해서 이미 하나가 된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게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요즘엔 산책길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손잡고 걷는 것 대신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광경을 자주 본다. 그 귀엽던 손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 동시를 읽으며 필자는 가슴 한 구석이 쓸쓸하다 못해 썰렁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뛰어다니는 말들 이재순 쉬는 시간 쏟아진 말들 교실에 가득하다 고삐 풀린 말들로 교실은 온통 말들의 들판 딩동 딩동 벨 소리에 말들은 모두 우리 속에 들어가 숨었다 스륵스륵 선생님 슬리퍼 소리 들린다 쉿! 우리들의 들판 수업이 끝난 교실은 시장바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게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다. 시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작품 속에 고스란히 살려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쏟아내는 말과 들판을 달리는 말을 교묘히 섞어 작품의 향기와 함께 ‘맛’을 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있다. 교실에 쏟아내는 아이들의 말이 들판을 달리는 말만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은연중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 있는 소리, 꾸미지 않은 말은 아이들만이 지니고 있는 동심의 힘이자 삶의 에너지다. 그건 때 묻은 어른들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런 초등학교 경험을 갖고 있다. 휴식시간. 그 짧은 시간은 우리들의 독무대였다. 칠판에 낙서하는 아이, 노래 부르는 아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이, 책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아이, 운동장인 양 뛰어다니는 아이….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쇼였다. 그 풍경은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줄 안다. 저 들판을 달리는 말이 돼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슬리퍼 소리가 나면 쉿! 조용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윤수천 아동문학가
밤 5형제 박재성 까칠까칠 까칠한 밤송이가 입을 쩍 벌리면 윤기 자르르한 알밤 5형제가 투두두둑 떨어져요 누가 형일까요? 모닥불에 올려놓으면 서로 형이라고 뻥뻥 소리쳐요 누가 형인지 정말 정말 모르겠어요. 조용할 날 없는 아이들 가을은 마음이 넉넉해지는 계절이다. 높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들녘마다 곡식과 과일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이 동시는 가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밤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나의 밤송이에서 나온 알밤 다섯이 서로 형이라고 우긴다. 그것도 ‘뻥뻥’ 소리 높여 외친다. 시인은 밤 5형제를 통해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모였다 하면 온 방을 운동장으로 만든다. 방뿐인가. 골목이며 공원 같은 곳도 저희들의 안방이나 다름없다. 시끄럽기 그지없는 게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다. “시끄럽다”느니 “제발 조용히 놀 수 없니” 하는 말은 무용지물이다. 우린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가만있지 못하고 시끄러운 건 곧 살아 있다는 것이고 성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돼간다. ‘누가 형일까요?’... ‘누가 형인지/정말 정말/모르겠어요.’ 시인은 끝내 누가 형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밝히지 않은 걸로 안다. 알밤 다섯 개가 모두 형이기 때문이다. 외아들로 태어난 필자는 어릴 적 형이 있는 친구가 몹시도 부러웠다. 형과 같이 다니는 친구를 보면 나도 형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다 지난 얘기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시골집 오명희 공부하러 서울 간 똑순이 누나 일 찾아 서울 간 똑독이 형아 누나가 쓰다만 화장품 냄새 형아가 두고 간 운동화 두 짝 누나가 보고 싶나봐 형아가 보고 싶나봐 시골집은 오늘도 고개가 아파요. 그리움이 남긴 흔적 사람의 감정 가운데 그리움처럼 맑은 게 어디 있을까. 순백의 얼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물에 비친 달의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이 동시는 서울 간 누나와 형아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담았다. 재미있는 것은 누나와 형아가 두고 간 그리움의 흔적이다. 누나는 ‘화장품 냄새’로, 형아는 ‘운동화 두 짝’으로 보여준다. 왜 아이가 직접 보고 싶다고 하지 않고 그것들이 보고 싶다고 했을까. 이게 더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자기 대신 뭔가를 내세워 은근슬쩍 감정을 표현했을 때 몇 배의 효과를 낸다. 사랑도 마찬가지. “나 너 좋아해” 하는 것보다 “내 그림자가 말이지, 너를 많이 좋아하나 봐” 했을 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문학에 있어 비유는 요리의 양념이자 소스다. ‘시골집은 오늘도/고개가 아파요.’ 이 또한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구절인가. 아이의 마음을 시골집이 대신해 주고 있다. 오명희님은 적잖은 나이에 첫 동시집을 낸 이후 꾸준히 동시를 쓰고 있다. 손자 손녀들과 함께 문학 속에서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해서 말인데, 글쓰기는 혼자서 갖고 놀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특히 노후엔. 윤수천 아동문학가
충전 김재수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한 시간 걸린다는 문자에 10, 20, 30%... 점점 채워지는 숫자도 보인다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이는 엄마 힘내라고 두 손을 꼭 잡았다 10, 20, 30%... 엄마가 충전되고 있었다 엄마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삶을 충전하는 온기 충전은 기계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이 동시는 휴대폰을 통해 엄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엄마, 참 고단한 이름이다. 한 가정의 살림을 꾸려 가는 사람. 살림뿐 아니라 한 집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 요즘엔 여기에다 바깥일(직장)까지 떠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발은 스무 개가 있어도 부족하다. 아이는 고단한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며시 다가가 손을 잡는다.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듯이. 이에 힘을 얻은 엄마가 대답 대신 빙그레 웃는다. 휴대폰의 충전기와 아이의 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초등학교 강연을 할 적에 필자는 어린이들에게 꼭 당부한 말이 있었다. 집에 들어갈 때 ‘씩씩하게’ 들어가라고. 그러면 부모님은 제아무리 힘든 하루였다 할지라도 피곤하지 않다고. 여러분의 그 씩씩한 모습 하나가 부모님에겐 삶의 충전이 되는 거라고.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꼭 내 얼굴을 살피셨다. 나중에 커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식은 부모님에게 하나의 충전기다. 이 동시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재수 시인은 거의 하루에 한 편씩 동시를 써내는 생산성 높은 작가다. 부럽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비의 손 이재순 두두두두, 다다다다 수만 개비의 손가락을 가진 손 터진 논바닥 말라가는 밭고랑 꿰매고 목마른 벼 시든 콩잎 어루만진다 애타는 할머니 마음도 젖은 손이 꿰맨다. 생명의 단비 비도 손을 가졌나 보다. 그것도 수만개의 손가락을 가졌나 보다. 이쯤 되면 그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분명하다. 역시 시인의 생각은 일반인과 다른 면이 있다. 이 동시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비의 수많은 손이 말라가는 밭고랑을 꿰매고 벼와 콩잎에 물을 길어다준다. 어디 그뿐인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할머니의 마음도 적셔준다. 어릴 적 이웃에 사는 감나무집 할머니는 비를 그냥 비라고 하지 않고 꼭 ‘님’자를 붙여 빗님이라고 말했다. 비는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내린다고 해서 존칭어를 썼다. 어떻게 보면 그게 옳은 말인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달하다 못해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오늘날에도 비만은 어쩔 도리 없이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시인은 이런 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썼다. 터진 논바닥, 말라가는 밭고랑, 목마른 벼, 시든 콩잎. 이를 바라보는 시골 할머니 마음까지를 보듬는다. ‘젖은 손’은 비의 손이자 곧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은 얼마 전, ‘티슈, 손 내밀고 있는 하얀 손수건’이란 동시집을 내어 금년도 이주홍문학상을 받았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독특한 표현으로 감동을 준다는 게 심사 소감이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반딧불이 이성혜 반딧불이는 왜 반짝일까요? 그건 아마도 달빛 한 스푼, 별빛 한 스푼, 내 웃음도 한 스푼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나 봐요. 어둠을 밝히는 반짝임 여름밤의 총아는 뭐니 뭐니 해도 반딧불이 아닌가 한다. 어둠 속을 날아다니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기의 눈빛 같은 반딧불.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반딧불이를 잡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추억을 갖고 있을 줄 안다. 이 동시는 여름밤의 그 반딧불을 노래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반딧불이가 어떻게 빛을 내는가를 설명해준다. ‘달빛 한 스푼, 별빛 한 스푼…’ 그러니까 반딧불이가 내는 빛은 ‘자연’의 빛이라는 것이다. 맞다. 다 알다시피 반딧불이는 맑은 계곡물에서 서식한다. 그래서 맑디맑은 빛을 낼 수가 있다. 필자는 오래전에 반딧불이를 동화로 쓴 적이 있다. 아이는 그 반짝이는 반딧불을 갖고 싶어 간신히 반딧불이를 잡아 유리병 안에 넣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유리병 안의 반딧불이가 빛을 내지 않는다. 이에 실망한 아이는 유리병 속에 든 반딧불이를 내보내 준다. 그런데 유리병 안에서 나온 반딧불이가 고맙다는 듯 하늘로 날아가며 반짝하고 빛을 내는 게 아닌가. 필자는 그 동화를 통해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반딧불이는 누구의 지시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내고 싶어 빛을 낸다는 것을. 이 동시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수박 씨 김경옥 엄마 수박 속에 잠자는 아기 수박 살살 꼬여내어 밭에다 놀게 해줬다 푸른 싹 틔워보라고 줄기도 뻗으라고. 싹 트는 아기 수박 과일 가게마다 여름 과일이 풍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수박이다. 덩치도 클 뿐 아니라 왕성한 초록빛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이 동시는 수박을 소재로 삼되 그 속에 들어있는 ‘씨’를 노래하고 있다. ‘아기 수박’이라고 한 것도 귀엽지만 이를 ‘살살 꼬여냈다’는 표현이 너무도 재미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꼬임의 목적이다. 그냥 놀자고 꼬여낸 게 아니라 스스로 생성의 맛을 느껴보라고 한 것이다. 이쯤 되면 꼬임 그 자체는 결코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다. 우린 누구나 어릴 적에 친구를 꼬여냈거나 꼬임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많은 꼬임은 대체로 같이 놀자는 것이었을 것. 그게 친구였고, 꼬임을 당한 쪽도 즐겁기 그지없었다. 김경옥 시인은 시조가 전문 분야임에도 간간이 동시조(童時調)를 보여주고 있다. 동심을 한껏 우려낸 이 동시조의 매력은 귀엽고 재미있음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 동시는 무엇보다도 귀엽고 재미있어야 한다. 간혹 문학성 운운하면서 어렵게 쓴 동시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느끼는 필자의 감정은 억지로 넘기는 알약과 같다. 요즘엔 알약도 넘기기 좋게 코팅을 해 제조한다. 동시도 그래야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하느님의 회초리 오순택 빗금으로 오는 비는 하느님의 회초리 회초리 맞고 풀잎은 푸른 멍이 들고 꽃잎은 얼굴이 붉어진다. 더 푸르게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하느님의 매운 회초리 풀꽃이 아름다운 이유 필자는 이 동시를 읽고 나서 세 번 놀랐다. 한 번은 하느님은 말씀으로만 훈계를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었고 또 한 번은 응징의 뜻으로 회초리를 드시는 게 아니라 격려의 차원에서도 회초리를 드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이 비밀을 오순택이란 시인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온 세상의 풀잎과 꽃잎이 푸르고 아름답게 피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회초리 덕분이라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갑다. 50, 60대 이상 된 이들은 회초리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쯤은 갖고 있으리라. 부모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선생님한테서 받은 회초리 추억이거나.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잘못한 일에 대한 응징? 아니면 잘되라고 내린 격려? 같은 회초리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아픔의 차이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동시 속의 하느님은 ‘더 푸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피어나라는 뜻으로 풀잎과 꽃잎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이를 안 풀잎과 꽃잎은 웃으며 하느님의 회초리를 달게 받았다. 해서 말인데, 하느님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풀잎과 꽃잎에게만 회초리를 들지 마시고 제발 우리들한테도 따끔한(?) 회초리를 내리시옵소서. 윤수천 아동문학가
제비꽃 박민순 큰 꽃은 대충 넘겨보지만 쪼그리고 앉아 가까이서 본다 어린아이가 기도하는 듯한 너를 자세히 본다 잘났다 뽐내지도 못났다 숨지도 않고 작은 키 곧추세워 꽃을 피우니 아름다운 네 모습에 내가 젖는다. 평범함 속 아름다움 제비꽃은 키가 작다. 키뿐 아니라 생김새도 조그맣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만큼 쪼그리고 앉아야 간신히 눈을 맞출 수 있는 꽃이다. 시인은 하고많은 대상 속에서 왜 제비꽃을 시제로 삼았을까. 시인은 제비꽃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들을 찬양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다. 잘났다고 뽐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목소리조차 소음이 될까 봐 조심하는 이들. 먼저 달려 나가기보다는 함께 가고 싶은 이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려는 이들. 더불어 사는 삶이 곧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들. 운동회 때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다리를 묶어 달리기를 한 경험이 있다. 결승선까지 넘어지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보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튼튼히 받쳐주고 있는 것을 본다. 목소리만 커가지고 나라니 국민이니 앞세운 사람들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 동시는 그런 뜻을 은연중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네 모습에/내가 젖는다.’ 그렇다.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나비처럼 걷다 송영숙 아파트 뒷동산 오솔길 짧은 오르막길 지하철 타러가는 지름길 내가 즐겨 걷는 길 배롱나무 꽃잎 잔뜩 떨어진 오늘 아침 오솔길 떨어진 꽃잎, 밟히면 아플까 나비처럼 가볍게 걷는다 오솔길 옆 작디작은 풀꽃 위를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꽃은 꺾는 게 아니라 보는 것 오솔길은 혼자 걷도록 난 길이다. 그래서 실처럼 가늘다. 굳이 넓을 필요가 없다. 사람 하나 빠져나가면 되는 길이 오솔길이다. 반면에 오솔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이 동시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준다. 엊저녁에 비가 왔는지 길에는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있다. 아이는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조심스레 떼 놓는다. 아이의 마음이 천사 같다. 어릴 적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공원에서 뛰놀던 아이가 바람에 날려 모자가 꽃밭으로 들어가자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꽃밭에 들어가면 꽃이 망가질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마침 공원에 산책 나왔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지팡이로 꽃밭의 모자를 건져 내준다. 동심은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이다. 지난번 화마에 잿더미가 된 산과 들을 보며 우린 많은 생각을 했다. 한순간의 부주의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와 함께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자연 속에 있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골탕 이성자 엉뚱하기로 소문난 우리 반 대풍이 4학년으로 올라온 첫날 -선생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그야, 된장찌개지. -그럼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요? 잠시 생각에 잠긴 선생님 활짝 웃으며 -그야, 골탕이지. 한 방에 아웃된 대풍이 일 년 내내 힘 못 쓰겠다. 짓궂은 학창시절 추억 어느 학급이고 짓궂은 친구가 있다. 특히 선생님만 골라서 골탕을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이 동시 속의 대풍이도 그중 하나다. 4학년이 돼 처음 맞는 선생님을 골탕 먹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대풍이. 그런데 이를 눈치 챈 선생님이 먼저 한 방을 먹인다.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골탕’이라고. 이때의 대풍이 표정은 어떠했을까. 보나 안 보나 우거지상이었을 것 같다. 학창시절은 참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 가운데는 아름다운 추억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추억도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좋은 친구도 있지만 못된 친구도 있다. 남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는 친구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런 친구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모범생보다 말썽꾸러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던가. 글도 다를 게 없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반면에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골칫덩어리는 항상 글의 중심에 선다. 위 동시에서 대풍이가 착한 아이였다면 이성자 시인은 글을 못 썼을 것이다. 고맙게도 말썽꾸러기였기에 작품 하나를 얻은 것이다. 작가들은 이처럼 고약한(?) 아이들을 찾아다닌다. 그러고 보면 작가들도 참 못된 취향을 갖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