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담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면서 가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있는가?” 지금 여기, 수업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는 당신이 정말로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연히 있다고 답한다. “네, 있습니다.” 그러렴 나는 다시 물어본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여기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느끼고 있습니까?” 많은 학생이 잠시 멈춰 생각한다.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떤 이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 반응 속에서 나는 학생들이 존재의 의미를 직면하는 순간을 본다. 단순히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몸이 있다는 것, 말을 하고 반응을 보이는 것,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아는 것은 모두 물리적 있는 것 뿐이다. 존재론적 ‘있음’은 다르다. 존재론적 존재란, 스스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의미를 선택하며,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진정한 존재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하고 경험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로 서 있는 상태다. 존재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살아내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로 살지 못하고, 즉 스스로 자신을 지시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가를 탐색하는 대신 다른 것으로부터 지시된 것들 어떤 사건, 의무, 조건화된 가치 등에 매몰돼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심지어 감정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는 화를 내야돼”, “지금은 슬퍼 해야해” 등과 같은 기준에 따라 결정할 때도 있다. 이 질문은 상담학과 학생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단순히 수업에 참여하고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담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는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힘이 되어주기 어렵다. “나는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상담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성찰하는 출발점이다. 내가 정말 존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순간에 집중하라는 말이 아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현재를 최대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자기 가능성을 진정으로 살아낼 수 있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상담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내담자를 만나거나 안내하기 이전에 자기 삶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한다. 상담자는 자기로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자각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상담자가 자기 존재를 풍성하게 경험할수록, 그는 진정한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인 내담자를 만나게 된다. 이때 내담자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는 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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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5-11-04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