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분의 시대, 공론장의 책임

최근 스타벅스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기업 마케팅 실패를 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후 등장한 이른바 ‘탱크데이’ 표현과 세월호 참사 10주기 당시의 ‘사이렌 머그’ 논란은 기업 비판을 넘어 불매운동과 정치적 공방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기업과 브랜드는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태도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나이키가 미국프로풋볼(NFL) 선수 콜린 캐퍼닉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이후 거센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고 최근에는 일론 머스크의 정치적 발언 이후 테슬라 차량 로고를 제거하는 소비자들까지 등장했다. 소비 행위 자체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신호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광주에서 5·18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폭력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지켜낸 공동체의 살아 있는 기억이다. 세월호 참사 역시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집단적 기억을 남긴 비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 폭력이나 사회적 참사를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상업적 맥락 속에서 소비될 때 시민이 이를 단순한 실수 이상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는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기업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 주체에 머물지 않는다. 기업의 광고와 언어, 이미지와 상징은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문화적 행위가 됐다. 특히 민주주의의 희생과 공동체의 아픔이 담긴 역사적 기억을 다룰 때 기업은 시장논리 이전에 공공적 책임과 사회적 감수성을 고민해야 한다. 무심한 표현 하나가 오래된 상처를 다시 현재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역사적 상처에 대한 시민적 공감과 공분은 민주주의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감수성이다. 다만 그 공분이 온라인 공간의 즉각적 감정 구조 속에서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 변질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최근에는 특정 브랜드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 입장의 증거처럼 해석하거나 상대를 조롱과 낙인의 대상으로 삼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 역시 감정의 흐름에 올라타 상대를 향한 비난과 규탄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소비의 영역마저 진영 대립의 언어로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정보보다 반응이 먼저 움직이고 맥락보다 진영이 앞서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디지털 공간은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동시에 분노 역시 증폭시킨다. 문제는 그 속도 속에서 성찰의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는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힘이지만 숙고 없는 분노는 쉽게 또 다른 적대의 언어가 된다. 공론장이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단죄의 공간으로 변질될 때 민주주의 역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는 민주주의를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동일한 생각을 강요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과 입장을 가진 시민이 끝내 대화를 지속하려는 노력 속에서 유지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거센 감정 경쟁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에 대한 깊은 공감 위에서 공론장의 책임과 절제를 회복하려는 시민적 성숙이다. 민주주의는 분노만으로도, 무관심 속에서도 유지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떤 언어와 태도로 사회 속에 남기는가다. 공분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절제를 잃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배제와 대립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분노의 크기가 아니라 그 분노를 공존의 언어로 바꾸는 능력 속에서 드러난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경기만평] 최종보스 등장...?

[사설] 교사 죽음 부른 사학 장벽, 교육감 후보들이 답해라

원칙을 지킨 교사가 학교와 갈등을 빚는다. 학교 측에서 일상 털기로 불이익을 준다. 조직 내에서도 따돌리기와 무시가 이뤄진다. 참다 못해 학교 측 비리를 상부 기관에 고발한다. 이후 학교 측 보복은 노골적이고 잔인해진다. 결국 해당 교사는 모든 걸 잃고 세상을 등진다. 사학 비리 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다. 이 상황을 옮겨 놓은 듯한 실제 사건이 생겼다. 아니, 영화보다 더 참담했던 현실이다. 지난 주에 발생한 어느 교사의 죽음이다. 전체 사건의 발단이 된 일을 살펴보자. 2011년 이천시 한 사립학교다. 학교에서 내려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 수능 준비생은 정규 수업에 빠져도 됐다. 그래도 수행평가는 만점을 부여했다. 하지만 A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업에 불참한 학생에게 원칙대로 최하 점수를 줬다. 학교가 말하는 현실적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게 있다. A교사의 선택이 옳고 바른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탄압의 시작과 참담한 죽음이다. 초기에는 학교 측이 감봉 처분을 내렸다. ‘위치 이탈 및 의무 위반’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3년간 휴직을 했다. 복직했으나 학교는 A교사에게 업무를 주지 않았다. 참다 못한 A교사가 학교의 비리를 당국에 고발했다. 경기도교육청이 수십억원대의 횡령을 밝혀냈다. 학교 측 인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학교 측이 꺼내 든 것은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책상 창고에 두기, 인터넷·사내 전화 끊기 등 조치였다. 도의적인 측면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감정적 대립을 평할 필요도 없다. ‘교사¯학교’ 갈등이 십수 년간 이어졌고, 불법에 대한 고발이 사실로 확인됐고, 도를 넘는 사력구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무법 지대이고 치외법권 아닌가. 그런데 교육당국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립학교 자율성이 보장되는 영역이다. 합법적 울타리를 친 것이 사립학교법이다. 15년간의 부당 대우, 감사권 남용 등에도 손댈 수 없었다. 종단에는 사람이 죽었다. 교육감선거가 한창이다. 교권에 대한 후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안민석 후보는 “무너진 교권 회복”을 말하고, 법적·제도적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임태희 후보는 “현장 안정 정책”을 말하고, 교권 보호 정책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다 좋은 취지다. 하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 “사학 감사권 확대”, “공익제보 교사 보호”, “교권 침해 시 교육청 직권조사권” 같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의향이 있나. 있다면 발표해야 한다. 15년을 고통받던 교사가 세상을 등졌다.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교육감 후보들이다. 관심을 갖는 것이 도리이고, 대책을 내는 것이 의무다.

[사설] 당료 우선 비례대표... 고인 물의 ‘충성공천’이다

1970년대에는 유신정우회라 했다. 국회 의석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했다. 유신 이념의 돌격대 역할을 했다. 5공화국 때는 전국구라 했다. 지역구 이해를 떠나 각계 목소리를 대변한다 했다. 그러나 정당의 자금줄 역할을 해 전국구(錢國區)로 불렸다. 지금 비례대표 의원의 전신이다. 1등만 의회에 입성하는 소선거구제 한계를 보완하려 했다. 취지와는 달리 폐해도 많다. 공천 과정의 불투명성이다. 당 지도부의 독주나 밀실 합의로 순번이 정해진다. 정당 권력 비대화 비판이 나온다. 이번 지방선거 비례대표 공천도 ‘당내 잔치’ 비판을 받고 있다. 장애인이나 청년,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 대변을 위한 제도다. 그러나 주요 정당 비례대표 후보를 보면 그냥 나눠먹기다. 갈수록 취지가 퇴색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인천 지방선거 비례대표 후보자들만 봐도 그렇다. 인천시의원 비례대표 후보 21명 중 11명(52%)이 정당 활동 경력이다. 인천 11개 군·구의회 비례대표 후보도 마찬가지다. 전체 22명 중 15명(68%)이 당직자 및 지역위원회 활동 인사들이다. 비례대표는 지역구 선거만으로 반영하기 어려운 사회 각계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제도다. 노동이나 복지, 장애인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 사회적 소수자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취지다. 그러나 대부분 정당 활동 인사들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인천시의원 비례대표 1번 후보를 보자. 인천시당 전 여성국장이자 현 정책위원회 부의장이다. 2번 후보 역시 현 인천시당 청년위원장이다. 국민의힘 1번 후보는 인천시당 소상공인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3번 후보도 인천시당 지역대표 전국위원이다. 기초의회 비례대표 후보도 마찬가지다. 각 당 지역위원회 장애인위원장, 여성위원장, 청년위원장, 당협 대변인 등 정당 활동가들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비례대표 의석이 늘어났다. 인천시의회는 4명에서 6명으로, 군·구의회는 15명에서 16명으로 늘었다. 의석 확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복지·장애·환경 분야 전문가들의 정치 참여 기회는 넓어지지 않았다. 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내 활동 경력과 조직 기여도, 인지도를 주로 보기 때문이다. 늘어난 비례대표 의석을 외부 영입보다는 당내 인사로 채웠다는 반증이다. 명분은 의회 다양화지만 실상은 당내 ‘충성 공천’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정당 실력자가 순번을 정하기 때문이다. 여의도 국회든 지방의회든 직업정치인들로만 채워지는 구조다. ‘정치꾼’들의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지지대] 고슴도치 딜레마

추운 겨울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온기를 나누려 모여들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서자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가 몸을 찔렀고, 아픔에 놀라 너무 멀리 떨어지면 다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정거리’를 찾아냈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는 이 적정거리를 잘 설명해 준다. 인간관계도 고슴도치와 다르지 않다. 상대방이 좋다는 이유로, 혹은 가족 및 연인이라는 명목으로 상대의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잦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다정한 간섭이 상대에게는 숨 막히는 구속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벽을 너무 높이 쌓으면 극심한 고립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직장 동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연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상처의 대부분이 ‘미움’이 아닌, 너무 잘해보고 싶었던 ‘지나친 가까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 삶의 중요한 화두인 적정거리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얼마 전 동창들과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오면서 이 적정거리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그 설렘에 한껏 들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한 동창의 한마디에 추억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동창은 ‘대화 중 자신을 과소평가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누군가는 그 친구를 향해 아직도 사춘기 감성이냐며 핀잔을 줄 수도 있었지만 동창들은 미안하다며 서로에게 사과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 친구의 한마디로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지만 오랜 기간 쌓아 왔던 친분으로 가볍게 던진 말과 거침없는 행동들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현장 시선] 교사 면책권 강화, 아동학대법 개정 시급

21일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현장 체험 학습’ 안전사고에 대해 교사가 중과실이 아니면 면책하는 방향으로 관계 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과실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현령 비현령식’ 기준이 되기 싶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재판에서 교사 혼자서 과실 여부를 입증해야 하는데 중과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판사의 판단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판사마다 중과실 판단 기준이 다르므로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중과실 판단 여부가 달라진다. 게다가 피해 아동의 학부모가 전관예우 변호인을 의뢰할 경우 ‘전관예우’ 제도의 불공정성 때문에 유죄가 무죄로, 무죄가 유죄로 뒤집히는 사례가 흔하므로 돈 없는 교사만 피해를 본다. 최근 5월 한 달간 필자가 랜덤 방식으로 경남지역 50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장은 학부모 민원을 가장 큰 골칫거리로 꼽았다. 현장 체험 학습을 피하는 이유도 학부모 민원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수업 중 떠든다고 학생에게 주의를 줘도 ‘아동 학대’로 민원이 빗발치므로 교육 활동이 지옥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동학대법’ 개정이 시급하지 교사의 중과실 기준을 정하는 법 제도 개정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현장은 아동 학대 관련 학부모 민원 때문에 공교육이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학교 공교육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동학대법부터 개정해 법률로 명시해 달라고 했다. 한편 교사의 중과실 기준 법률 제정 방안은 ‘양심적인 사람’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는가만큼 어렵다. 그러나 중과실 기준을 법률로 명시하지 않는 한 재판에서 판사의 판단 기준이 각기 다를 수 있으므로 판사의 오판 때문에 교사가 억울한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중과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교사가 아무리 중과실이 아니라고 재판에서 입증해봤자 속초 교사의 유죄 판결이 되풀이되는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교사의 중과실이 아니라는 법적 판결이 나더라도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할 경우 교사는 재판에서 금전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하니 그 지옥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현장이 요구하는 법은 매뉴얼에 의해 진행하는 교육 활동에 대해 100% 면책을 줘야 하고 부당한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에게는 강력한 법적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했다. 해결 방안으로 “교사의 의도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면 면책한다”로 법 개정을 요구했다. 의도적 행위가 아니고 생활지도를 목적으로 훈육했다고 할 경우 학부모의 아동 학대 주장은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의 부주의로 인한 안전사고도 교사가 면책돼야 한다. 특히 ‘수업 중 학부모 전화를 금지한다’는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교사 면책권 강화 방안을 법률로 명시하지 않는 한 교사의 교육 활동은 위축되고 공교육의 정상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맞춤형 교사 면책 개선 방안’을 구체적인 법률로 마련할 때 비로소 공교육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기고] 심각한 노인 빈곤율

“전 세계적으로 이런 망신도 없다.” 6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높은 자살률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드러난 현실은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자살 예방 상담 전화 인력이 예산 부족으로 정원에조차 미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사람이 죽어가는 동안 상담사 한 명 더 고용할 돈이 없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자살하는 사람은 노인이다. 자살률은 나이가 들수록 가파르게 높아지며 65세 이상, 특히 80세 이상 남성의 자살률은 전체 평균을 압도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오랫동안 놓지 못하고 있다. 만성 질환의 고통, 배우자를 잃은 뒤 찾아오는 극단적 고독,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노인 빈곤율. 평생을 일하고 자식을 키운 사람들이 노년에 선택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내가 죽어야 자식이 편하다’는 말이 망상이 아니라 현실로 느껴지게 만든 구조, 바로 이 나라가 만들어낸 구조가 노인을 죽이고 있다. 일본을 보라. 한때 연간 3만명이 넘는 자살자를 냈던 일본은 2007년 자살을 국가 책임으로 공식 선언하고 2009년에만 약 1천600억원의 예산을 자살 예방에 쏟아부었다. 2021년에는 세계 최초로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했다. 혼자 죽어가는 국민을 국가가 직접 찾아가겠다는 의지였다. 그 결과 16년 만에 자살자를 1만명 가까이 줄였다. 정책이 생명을 살린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역대 정부는 노인 빈곤과 고독 문제를 수십년째 알면서도 구조적으로 방치해 왔다. 기초연금은 생활을 지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정신건강 인프라는 여전히 도시에 집중돼 농촌 노인에게는 닿지 않는다.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상담 인력조차 채우지 못하면서 정작 국방예산과 대형 토목사업에는 수십조원을 쏟아붓는 나라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인 자살은 예고된 재난이었다. 그런데도 국가는 그 재난을 개인의 불행으로 처리해 왔다.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노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시스템을 버리고 국가가 먼저 찾아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기초연금 현실화와 의료비 부담 경감은 복지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안전망이다. 고독과 고립을 전담하는 국가 컨트롤타워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국무회의의 대통령 발언이 또 한번의 말잔치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노인 한 명이 홀로 생의 마지막을 결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죽음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라는 사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가장 무거운 책임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천자춘추] 안전선진국 출발점 ‘생명안전기본법’

심각한 재난 발생 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를 명확히 한 ‘생명안전기본법’이 7일 국회를 통과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법 제정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지 12년 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던 생명안전기본법의 기본틀은 국가의 생명안전보호 의무 명문화, 범정부 통합안전관리체계 구축, 예방 중심의 안전정책 전환, 피해자의 권리 보장 및 지원 강화, 사고 원인과 책임 규명을 위한 독립조사기구 설치, 시민이 참여하는 안전문화 확산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법의 핵심은 모든 국민이 생명, 신체, 재산을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 권리인 ‘안전권’을 명시한 것이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제36조 6항)에서도 보듯 국민의 안전보호를 위한 국가의 역할은 당연하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안전은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안전을 기본권으로 명시한 법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생명안전기본법은 5년 단위의 생명안전종합계획 수립, 정책 수립과 시행에 필요한 재원 확충, 안전 관련 기준 설정 및 기준의 적정성 평가 등 안전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책임을 담고 있다. 피해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권리를 보장한 것도 생명안전기본법의 큰 의미다. 피해자를 ‘안전사고로 인해 신체적·정신적·경제적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 정의함으로써 피해자의 범위를 당사자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목격자, 구조·수습·지원활동 참여자로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의 권리는 신속하고 적절한 사고 수습을 요구할 권리, 사고 대응의 적정성에 대한 조사를 요구할 권리, 재발방지대책 수립에 참여할 권리 등으로 구체화했다. 선진국은 천재(天災)에서도 인재(人災)적 요소를 찾아내 재발방지책을 마련한다. 반면 후진국은 인재적 요소가 분명한 사고도 천재로 치부해 버린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불가능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는데 우리 사회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어온 과정이 그러했다. 생명안전기본법은 갈등으로 얼룩졌던 참사를 뒤로하고 안전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출발점의 의미가 가장 크다.

[삶, 오디세이] 모두의 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유튜브 조회수로, 커버 댄스로, 그리고 이제는 스크린 위에서. 그를 모르는 Z세대 팬의 모창에서부터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어르신이 따라 하는 댄스까지 마이클 잭슨은 국경, 인종, 세대를 넘어선 단 한 명의 팝의 제왕으로 우뚝 서 있다. 앙투안 푸쿠아 감독의 영화 ‘마이클’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유족의 반발, 마이클 잭슨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아동 관련 의혹에 대한 침묵, 마이클 잭슨을 연기하는 그의 조카, 특정인의 통편집 등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공개됐다. 이 영화를 둘러싼 물음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전기 영화는 한 인간을 얼마나 진실되게 그릴 수 있는가. 답은 회의적이어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구조적 한계를 ‘마이클’이 끌어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소송을 두려워하고 제작사는 수익을 계산한다. 그 사이에서 인물의 속 깊은 내막은 지워지거나 희석된다. 제작에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재단이 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팬들은 미리 이 영화의 진위를 의심해 왔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실패한 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이클’은 그를 그리워하는 팬덤을 위한 선물 같은 작품이다. 소년에서 전설로 성장하는 서사,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위대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과정, 무대 위에서 폭발하는 에너지, 시대를 가로지르는 음악.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어둠보다는 빛을, 고통보다는 신화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극장문화의 지형을 읽을 수 있다. 현재 극장의 가장 충실한 관객은 40~60대다. OTT의 범람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자신이 청춘을 보낸 시대의 음악, 열광했던 스타의 이야기가 큰 화면에 펼쳐질 때 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마이클 잭슨의 황금기인 1980~90년대를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가 바로 지금의 중장년 관객이다. 최근 몇 년간 극장가를 달군 작품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와 ‘엘비스’는 록 음악의 황금기를 경험한 세대에게 그 시절을 돌려줬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편이 20년 만에 제작되고 ‘미션 임파서블’이나 ‘쥬라기 공원’처럼 수십년 된 프랜차이즈의 속편이 줄을 잇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향수(鄕愁)는 콘텐츠가 된다. 중장년 관객의 기억 속에 각인된 브랜드는 가장 안전한 흥행 공식이다. ‘마이클’은 그 공식의 정점에 놓인 기획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냉소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전기 영화는 오래된 형식이고 인물의 이상화는 이 장르의 본질적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관객의 태도다. ‘마이클’을 보면서 스크린 위의 그가 마이클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의 해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해석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구성됐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 영화를 보는 성숙한 일일 것이다. 곧 제작될 속편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오래도록 괴롭힌 사건과 그의 내면에 대한 다각적인 묘사를 기대하며 신화가 아닌 인간 마이클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경기만평] 저랑 게임 한 번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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