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평택 장애인 재산 편취 의혹, 경찰이 밝혀줘야

장애인·노약자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도 다양한 보호망을 마련하고 있다. 그 일선의 첨병이 활동지원사, 요양보호사들이다. 지금도 장애인·노약자들 곁을 지켜주는 건 이들이다. 직업이라기보다는 봉사한다는 사명감이 크다. 감사한 직업이다. 하지만 아주 일부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장애인·노약자의 인지 능력 부족을 악용한다. 특히 재산 편취라는 불법까지 저지른다. 꾸준히 늘고 있고, 대담해지는 양상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유형들이다. 활동지원사가 지적장애인의 통장을 3년 관리했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돈 1억원을 횡령했다. 2022년 사건이다. 또 요양보호사가 중증장애인 명의로 대출 8천만원을 받았다. 2023년 사건이다. 또 장애인 보험금 2억원을 수령 후 잠적한 보호사도 있다. 2024년 사건이다. 정신장애인에게 접근해 부동산을 증여받아낸 경우도 있다. 역시 2024년 사건이다. 이밖에 열거하지 않은 의혹이 수두룩하다. 각각의 행위는 엄연한 범죄이고 엄벌로 규정돼 있다. 횡령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사기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피해자의 심신 미약을 악용했을 때는 준사기로 가중 처벌된다. 범죄 행위에 위조·변조가 병행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도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보다 근본적인 처벌 조항도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다. 이때는 형사처벌과 손해배상이 병과된다. 또 하나의 의혹이 제기됐다. 본보가 보도했다. 평택 안정리에 거주 중인 장애인 가족 얘기다. 5명의 가족 모두가 지적·시각장애인이다. 원래는 팽성읍 노와리 주택에서 살았다. 장애인 돌봄단체 대표 A씨의 도움을 받아 왔다. 그런데 장애인 가족의 부동산이 A씨에게 증여됐다. 또 A씨 언니를 통해 장애인 가족이 보험에 가입했다. 가족은 “A씨가 상속 처리를 해준다고 해서 도장 등을 넘겨줬는데 (증여는)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가족이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졌다.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집에 인테리어를 했다. 이를 본 마을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알렸다. 본보가 들어 본 A씨의 입장은 이랬다. “암 진단금으로 받은 돈을 장애인 가족의 거주지 이동, 이사 비용 등으로 쓰며 돌봐주며 인테리어 비용도 1억원 들어갔다”, “증여 취소는 인테리어 등에 사용한 돈을 모두 되돌려 줘야 해줄 생각이다.” 경찰은 최근 A씨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동네 주민들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이의 신청을 하겠다고도 한다. 평생을 이웃하며 살았던 주민들이다. 그들의 상식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우리도 모른다. 다만 증여의 이유와 과정, 인테리어의 필요와 결정, 그리고 거기 사용된 서류의 진정성 등은 살펴야 할 것 같다. 경찰의 처리 결과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 다섯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다.

[사설] ‘지방의원 공약 공개’ 시민단체 목소리다

제시된 제도 개선 방향은 이런 거다. 첫째, 지방의원 공보 제출 기준을 의무화해서 강화하라. 둘째, 공보 안에 필수 항목을 법으로 정해야 한다. 셋째, 지방의회 홈페이지 공보·공약을 상시 게시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수원·인천·광주·대구·대전 등 전국 21개 지역 경실련협의회가 발표한 공동 성명이다. 현실 문제도 지적했다. “지방의원이 주민의 평가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본보가 최근 ‘지방의원 공약 추적단’ 보도를 했다. 현행법상 지방의원에게는 공약서를 제출할 의무가 없다. 공직선거법 제66조에 공약서 제출 대상이 정해져 있다. 대통령 후보와 지방자치단체장 후보가 대상이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은 거기서 제외돼 있다. 법이 정한 공개 대상은 ‘(공약) 사업 목표’, ‘우선순위’다. 이를 담은 공약서를 제출할 법적 의무가 없다. 선출직인데 공약 공개를 감춰 주고 있는 것이다. 취재팀 지적이 이 부분이다. 공약을 점검할 가능성은 그나마 있다. 선거 때 제출됐던 공보 제출이다. 그런데 이것도 의무가 아닌 선택 사안이다. 공직선거법 제65조는 ‘(공보를) 작성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강행이 아닌 임의 규정이다. 이러니 제출된 공보 내용조차 세밀할 리 없다. 정치 또는 전국 상황을 그대로 베낀 슬로건으로 채워지기 일쑤다. 그나마 유권자가 보려면 힘들다. 선관위 도서관 등에 공보가 공개돼 있지만 기준, 범위가 모호해 평가하기가 어렵다. 지방의회선거는 풀뿌리민주주의의 기초다. 민생과 직결된 가장 가까운 곳을 대변한다. 어떤 공직 선거보다 민생과 직결돼 있다. 당연히 거기서 다뤄지는 공약도 현장에 가깝다. 평가돼야 하고, 공개돼야 한다. 굳이 그 이유를 들면 이렇다. 후보자의 정책 비전 비교가 가능해야 하고, 정책 경쟁 선거로 전환해야 하고, 무투표 당선·깜깜이 선거를 방지해야 한다. 지방의원의 공약 공개가 이뤄져야 ‘정책에 의한 선택’으로 갈 수 있다. 보도의 효과는 있었다. 일부 광역의회가 개선 의사를 표했다. 홈페이지 개편을 약속했다. 존중한다. 다행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간단하면서 유효한 길, 그것은 입법이다. 지방의원의 공약 공개를 의무화하면 된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공약을 공개해야 한다’고 법제화하면 된다. 누구나 정의라고 생각하는 선출직의 의무다. 이걸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를 막아서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지지대] ‘국민교육헌장’

가구를 정리하다 보면 늘 나오는 게 있다. 앨범이 그랬다. 케케묵은 흑백사진이 과거를 소환해주곤 했다.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같이 불려 나오는 기억의 편린들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개구쟁이 시절 밤잠을 설치게 했고, 학교 가기가 부담이 됐던 시절이 있어서다. 그 까닭은 간단했다. 등교하자마자 선생님 앞에서 달달 외워야만 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혼쭐이 났다. 국민교육헌장 이야기다. 발표된 시기는 1968년 12월5일이었다. 기초위원 26명과 심사위원 48명 등이 모여 작성한 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새마을운동만큼 많이 보급됐다. 철학자 박종홍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 주도했다. 5차 교육과정 때까지는 교과서 앞 부분에 맨 먼저 인쇄됐다. 학생은 물론이고 근로자, 공무원, 군인, 경찰을 막론하고 무조건 암송해야만 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중간 부분에는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자는 내용이 이어졌다.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자는 권유도 있었다. 발표 초기부터 반발이 심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을 존중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부속품으로 여기고 도구로 생각하는 사고관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란 표현이었다. 경제 발전이 당시로는 국가적인 어젠다였다. 오늘날 시점에서 보면 전체주의적인 관점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 헌장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4년 폐지됐다. 발표된 지 26년 만이었다. 역사는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이 같은 명제를 새삼 일깨워주는 한 편의 에피소드가 씁쓸하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하미에서 투루판으로... 험난한 여정

우리는 ‘서역북로’ 실크로드 길을 지나고 있다. 실크로드 코스 중 가장 험난한 지역이다. 신장(新疆)은 300여년 전 청나라 건륭제가 위구르족이 살던 서쪽 땅을 점령하고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청나라 영토로 편입한 지역이다. 신장의 위구르족에게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지하드 조직과 무슬림 군사 조직이 무기를 지원하면서 독립을 부추기고 있어 긴장이 맴도는 지역이다. 위구르족은 튀르크족(돌궐족) 계통의 종족으로 톈산산맥 북쪽 알타이산맥과 몽골고원에 살았던 종족이다. 전성기는 740~840년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통일한 종족이다. 현재는 없어진 ‘마니교’를 국교로 정한 유일한 국가다. 840년 왕족의 내분과 키르기스족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일부 위구르족 지배층이 톈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사막의 투루판, 쿠차 지역으로 도망 와서 다시 ‘위구르 왕국’을 세우고 15세기경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중국은 조선족을 포함해 56개 소수민족이 있다. 위구르족은 현재 약 1천200만명으로 독립 의지가 가장 강한 종족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가 내전을 벌이던 1940년 카슈가르를 수도로 ‘동투르키스탄’ 국가를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 군대가 1949년 신장에 진입함에 따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세기 말에도 독립을 지지하는 대학생 시위가 카슈가르, 쿠차 등에서 발생하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 자살 테러 등이 있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신장 지역은 위구르족 테러 방지를 위한 공안의 검문검색으로 마치 전쟁터를 통과하는 것처럼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미의 특산물로 ‘하미과’가 유명하다. 하미과는 참외와 수박의 중간 크기다. 우리가 먹는 멜론과는 다르다. 하미과는 황제의 진상품으로 유명해졌다. 적당한 당도,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과육과 향기가 독특하다. 하미과가 유명해진 것은 과거 당나라 황제의 식탁에 오른 후부터다. 임금이 어느 지역에서 보내온 것인지 묻자 환관은 엉겁결에 “하미입니다”라고 답한 다음부터 하미 주민은 이 과일을 장안으로 보내는 고생이 시작됐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하미에서 투루판까지 400여㎞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야 한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곳’, 즉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사막이다. 면적이 33만~37만㎢로 남쪽은 쿤룬산맥, 북쪽은 톈산산맥으로 둘러싸인 ‘타림분지’ 안에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도로 양옆으로 수십㎞ 이어지는 ‘풍력발전’ 단지다. 대량 설치에 따른 ‘규모의 경제’ 때문에 설치 비용이 우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과거 타클라마칸사막의 악명 높은 바람을 ‘카라부란’(검은 바람)이라 했다. 사막에서 짐을 실어나르는 낙타는 상인들에게 ‘사막의 배’로 불린다. 낙타는 사람보다 모래폭풍 카라부란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울음소리를 낸다. 상인들은 낙타 옆에 숨어 무서운 모래폭풍 카라부란으로부터 생명을 지켰다고 한다. 낙타는 20여일간 물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는데 보통 5일에 한 번 먹는다고 한다. 옛날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민들은 어린 자녀들 손목에 작은 방울을 달아줬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와 아이를 모래로 덮거나 바람에 날려가면 아이를 찾기 위해서다. 주민들을 힘들게 하던 사막의 바람이 이제는 전기를 일으켜 돈이 되는 신재생에너지가 됐다. 오후 3시경 투루판 외곽에 도착하니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의 붉은 산맥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민둥산이다. 명나라 오승은이 16세기 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지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다. 위구르어로 화염산은 ‘붉은 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투루판은 과거 불의 도시 ‘화주(火州)’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연간 일교차가 78도나 된다고 한다. 투루판은 6, 7세기 ‘고창왕국’이 있던 지역이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 법사와 고창국 왕(국문태)의 만남(629년)으로 유명하다. 고비사막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 소식을 고창왕이 들었다. 왕은 현장을 투루판으로 모셔 와 불법을 듣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서유기 소설에 손오공이 ‘우마왕’ 요괴와 싸우기 위해 ‘파초선’을 빌려와 화염산 불을 끄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오후 화염산 매표소에 도착했다. 7월 말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기온이 섭씨 45도다. 투루판은 해수면 이하 저지대 분지여서 여름철 더위가 혹독한 지역이다. 화염산 매표소 근처에 가보니 높이 20m의 긴 장막으로 화염산을 가려 놨다. 돈 내고 입장권을 끊어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만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중국판이다.

[생각 더하기] 사설 장애인 이동권 위한 민주주의

1981년 유엔 총회에서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주제로 12월3일을 세계장애인의 날로 선포했다. 매년 정부는 이날을 전후로 세계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을 열고 여러 기념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장애인의 삶을 돌아봤을 때 명확한 것은 세계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에서는 매년 12월3일 세계장애인의 날에 거리로 나선다. 1박2일간 집회와 노숙 농성을 결의하며 장애인의 권리를 외쳤다. 지난해도 국회 앞을 낮부터 밤까지 지켰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역에서 100여명의 활동가가 남았을 무렵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다음 날까지 국회 앞을 지키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하루도 빠짐없이 광장에 나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말하고 ‘평등’, ‘정의’, ‘차별 철폐’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울려퍼졌던 날들이 지나간 이후에도 장애인 권리를 말하는 활동가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올해 12월3일에도 여전히 추위 속에서 국회 앞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장애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장애인은 아직까지도 이동권, 노동권을 비롯해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다. 비장애인들은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네에서조차 위험과 불편에 노출돼 시설로 배제되고 격리돼 왔다. 경기도 또한 그렇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장애인 거주시설이 있는 데다 저상버스는 아직도 탑승이 어렵고 장애인 특별교통수단도 한번 타려면 2시간씩 기다려야만 한다. 경기도는 2021년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름으로 ‘경기도 장애인 탈시설 자립생활 선언문’을 선포했으나 여전히 정책과 예산은 부족하고 단기적인 지원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이웃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정책도 충분하게 보장돼 있지 않다.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과정은 대부분 비장애인 위주로 돼 있고 장애인에게 돈을 쓰는 건 후순위라는 시혜적인 시선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누군가를 빼놓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약자를 배제하고 먼저 챙길 수 있는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0여년 전 휠체어 장애인이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해 사망하는 참사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시작됐다. 투쟁으로 만들어진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장애인을 비롯한 노인, 유아차 이용자 같은 사람들이 이동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장애인의 권리는 장애인만의 권리가 아니다. ‘누구도 뒤에 남겨 두지 않을 때’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한 차별 철폐의 길을 지금부터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이유다.

[사설] 병원안심동행서비스, 177만명에게 절박한 제도다

1인 가구, 특히 고령자를 위협하는 것이 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병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위급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죽음 앞에 방치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희망이 돼 주는 사업이 있다. 병원 동행, 진료 지원, 귀가 동행의 전 과정을 함께하는 병원안심동행서비스다. 경기도가 2023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성남·안산·광명·군포·과천·평택·시흥·광주·구리·양평·안성 등 11개 시·군이 참여하고 있다. 시행 첫해인 2023년 6곳, 2024년 10곳, 올해 11곳이다. 더 늘지 않고 있다. 이용 실태를 봤는데 역시 높지 않다. 2024년 8천497건에서 2025년(9월 현재) 9천276건이다. 반면에 전화 상담 비중은 높다. 2023년 69%, 2024년 53%, 2025년 55%다. ‘병원 동행 서비스’보다 ‘전화 안내 서비스’에 가깝다. 아쉽게도 현장에서는 제도가 자리잡지 못하는 느낌이다. ‘복지는 뒤로 가지 못한다’고 했다. 계속 추진해 가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절실한지는 통계로 확인된다.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서울시의 만족도 조사가 있다. 서울시는 2022년부터 정식으로 시행하고 있다. 전체 이용자들의 평균 만족도가 93.1%에 달했다. 내용 별로는 ‘병원 이용에 도움’이 95.7%, ‘서비스 제공 시점의 적절성’이 94.6%, ‘동행 매니저의 친절’이 94.7%였다. 이용자의 62%는 1인 가구였고, 이 중에 65세 이상 노인층은 77%였다. 수요는 충분히 확인된다. 경기도에서는 왜 이렇게 버거운 걸까. 가장 중요한 동행 인력이 경기도 전체 44명에 불과하다. 도내 1인 가구가 177만명임을 감안하면 절대 부족이다. 이마저 근무 시간이 각자 달라 공백이 많다. 신청자가 수일을 대기하거나 배정을 못받는 경우도 많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예산이다. 시행에 합류하지 못하는 20개 시·군이 내놓는 이유도 예산이다. 예산 문제는 제도 시행 단계에서도 제기됐던 만큼 새로울 게 없는 과제다. 결국 예산 운용의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시의 예를 들여다보게 된다. 서울시는 2021년 시범 사업으로 시작했다. 2022년까지는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했다. 2023년부터는 모든 시민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당연히 이용률도 높아졌고 만족도도 좋다. 투자와 수요가 선순환을 이루고 있다. 1년 상간으로 시작한 경기도와 너무 비교된다. 도민, 특히 수혜자인 경기도 1인 가구의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예산을 증액하겠다”며 “지자체와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2026년 경기도 병원안심동행서비스를 기대한다.

[사설] 영어체험 예산 80% ‘싹둑’... 인천 학생 교육 실수요 감안해야

지역연계 영어 체험활동이라는 인천시교육청 프로그램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축된 체험 중심 생활영어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2022년 시작했다. 그런데 인천시교육청이 2026년 예산에서 이 예산을 80% 삭감해 버렸다. 영어체험교육 수요가 많은 강화지역 등의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영어 체험활동이 존폐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역연계 영어 체험활동은 신청 학교에 예산을 지원한다. 지역 영어마을이나 대학 등에서 학생들이 원어민 강사와 함께 현장체험형 영어 수업을 한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이 프로그램이 명맥을 이어가기도 어렵게 됐다. 내년도 인천시교육청 예산에서 관련 예산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인천시교육청의 관련 예산은 2억원에서 1억원으로 줄었다. 산하 교육지원청 예산은 더하다. 인천북부교육지원청은 올해 4억3천만원에서 내년 4천800만원으로 89% 삭감했다. 인천서부교육지원청 예산은 3억3천700만원에서 3천600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인천동부교육청도 4억2천만원에서 5천600만원으로 줄었다. 전체 영어 체험활동 예산이 18억7천200만원에서 3억8천만원으로 줄어든다. 특히 농어촌지역 학부모 반발이 크다. 강화군학부모네트워크, 아이코리아 강화군지회 등이 최근 성명을 냈다. ‘글로벌 도시를 지향하는 인천에서 영어 학습 기회를 대폭 줄였다’고 했다. 인천 서구지역 학부모들도 가세했다. ‘공교육의 영어 체험 기회가 사라진다면 알아서 사교육을 더 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영어 체험 예산 삭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인천시교육청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영어 체험 예산을 삭감한 부분도 있다고 했다. 영어 체험 관련 사업을 조정하고 있다고도 했다. 처음 사업 도입 때보다 영어 교육 활동 과정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재정적 압박에는 예산 구조조정이 따른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천시교육청도 보통교부금 감액 등으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인천시교육청은 학생 중심 정책은 유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영어 체험 예산 삭감에 따른 파장을 보면 현장 체감도는 낮은 셈이다. 공교육의 본질은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 교육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획일적 예산 삭감은 교육 격차를 키울 수 있다. 특히 외국어 교육 접근성이 낮은 지역일수록 박탈감이 크다. 사교육 의존도를 높여 사회적 비용 증가를 초래할 수 있다. 학생·학부모들의 실수요가 많은 영어 체험인 만큼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지지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용기

작년 이맘때쯤. 늦은 저녁 회사 동료들과 함께 출입처 약속을 마치고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급히 차량에 타 시동을 걸었다. 잔고장이 많았던 차량이었지만 이날 따라 유독 말썽이었다. 1시간가량 시동이 안 걸려 손발이 얼어가며 추위에 떨다 결국 폐차를 결정, 차량 렌트를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매달 지불하는 렌트 비용이 아까워 최근 차량 구매를 위해 발품을 팔던 중 렌터카 내부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눈에 띄었다. 문득 “내부도 찍히나”라는 생각과 함께 1년 365일 동안 차 안에서 행한 지극히 사적인 언행들이 다 기록돼 있는, 말 그대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이 담긴 블랙박스라고 판단되자 거부감이 들었다. 설정 확인을 해보니 내부 촬영 기능은 없는 것으로 확인돼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일면식도 없는 렌터카 관계자에게 대단치도 않은 평범한 기자의 일상이 담겼을 수도 있는 블랙박스를 제출하는 일에도 ‘움찔’하는데 하물며 타인에게 어필하는 자신의 성향과 가치에 관한 정보는 어떨까. 대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MBTI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신을 알리는 또 다른 명함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의료계의 판단 등 객관적 근거를 토대로 수혈을 위해 도입된 ABO식 혈액형 분류. 이와 달리 본인이 직접 테스트를 거쳐 스스로 완성한 MBTI 검사 결과에 진심으로 자기객관화가 작동했을지 의문이 든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 인정받지 못한 그날의 불쾌한 경험과 감정이 일기장에서조차 외면받는 이유는 상처받은 지금의 내가 훗날 일기장을 볼 미래의 내가 아픈 기억을 상기해 고통받길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기록을 업으로 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김종구 칼럼] 세종대왕, “(종교) 급거히 개혁하려 들지 말라”

두박신 사건. 사이비 종교였다. ‘두박’은 사람 넘어지는 소리다. 옛날에 참형당한 장수와 재상의 혼을 소환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백성들이 놀라 종이와 베를 내놓았다. 강유두, 박두언, 최우 등이 만들었다. 밑바닥에 반정부 저항이 흘렀다. 고려조 충신들에 대한 동경이었다. 국법에 강유두는 교형에 처해져야 했다. 박두언·최우는 장 100대, 유배 3천리가 맞았다. 대신들이 임금에게 법대로 엄벌을 청했다. 임금이 대답했다. “그 정상을 생각해 보면, 화(禍)를 두려워하고 복을 받으려고 귀신에게 기도한 것뿐이었다. 또 한재(旱災·가뭄 재해)를 당해서 차마 중하게 죄 줄 수 없어서, 장차 경한 죄로 감해서 시행하고자 하니, 여럿이 의논하여 아뢰라”(세종 18년 5월28일·1436년). 시왕도 사건. 한양 바깥 사찰에서 유행했다. 죄인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 그림이다. 몸에 못 박는 모습, 오장육부 끄집어내는 모습, 끓는 물에 빠져 있는 모습.... 10개 지옥 모습이 끔찍했다. 겁먹은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 재물을 바쳤다. 사간원이 임금에게 고했다. “간사한 승도들이 생업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폐해가 이 그림에서 연유됩니다. 그림 둔 사찰을 불태우거나 헐어 버리게 하고... 죄를 주게 하옵소서.” 임금이 대답했다. “(승도들의 처벌을) 윤허하지 아니한다”(세종 22년 1월25일· 1440년). 불교 혁파 청원. 집현전 제학 윤회가 상소문을 올렸다. “불씨(佛氏)가 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적(夷狄)의 풍속으로 사민(四民)의 밖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궁곤에 빠지게 하여 도적질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백성들이 굶다가 죽는 것은 보았어도, 승려들이 굶주려 죽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날마다 방자하게 속이고 꾀어서 백성들의 고혈만 녹이니, 신 등은 이리하여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불씨의 법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급거히 한번에 다 개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세종 6년 3월8일·1424년). 세종은 너그러운 애민 군주였다. 백성을 보듬는 왕이었다. 하지만 국법 집행에는 추상 같았다. 조선 시대 왕이 27명이다. 사형을 가장 많이 집행한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 400명 이상의 죄인을 사형시켰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도 60명에 달했다. 조선은 유교에 기반한 나라였다. 억불(抑佛)은 조선 개국의 유지였다. 숭불(崇佛)은 국정에 반하는 거였다. 사이비 종교 처벌은 더 엄했다. 민심을 교란시키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세종의 접근은 사뭇 신중했다. 종교의 출발을 민심에서 찾았다. ‘가뭄이 심하니 복을 빌었던 것이다’, ‘민가에 오랜 세월 뿌리 내린 신앙이다’.... 종교의 기능을 국정 불만의 발현으로 봤다. 피로 물들인 역성혁명의 조선조다. 그때까지 고려에 대한 향수가 만연했다. 역모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불안한 여론을 누르지 않고 보듬어 달랬다. 종교의 역사를 정치보다 위에 놨다. 섣불리 개혁하려 들지 말라고 했다. 시왕도를 그렸던 승려. 사간원 주장은 참형. 세종은 덮어두라 했다. 두박신을 만든 강유두. 국법의 규정은 교형. 세종은 감형하라 했다. 만일 참형과 교형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실록에는 종교 탄압의 예로 남았을 거다. 읽기 불편한 부분으로 여겨졌을 거다.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는 울림을 남겼다. 600년 지난 지금도 어색하지 않을 ‘하교’를 내렸다. 종교 문제 처리에서조차 확인되는 세종대왕의 성군스러움이다. 主筆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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